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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시인 / 전람회
한 번 만나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기로 했는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북반구가 흩날리는 미술관에서 등에 붙은 꿀벌은 비상구로 날려주고 한 번 만나요
아직 돈이 없어서 미안해요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요
사람들이 울먹이며 복음서를 읽는 세기말이니까 땅이 뒤집혀 생긴 아름다운 추상화 앞에서 봐요, 우리
당신의 해골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여줘요 살았는지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어깨를 건드려보는 거리에서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현수막이 펄럭인다면 여기가 세상 끝이니까
하늘에서 윙윙 벌이 쏟아지니까 더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재난 경보음이 울리는 미술관에서 한 번 봐요, 우리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살아있는 당신 해골을 오래 관람해서 미안해요
창밖은 부옇고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
손미 시인 / 판화
나를 파줘 이게 첫 임무다 육신을 쪼갰어 침투한다 피가
밀어내고 밀어버리고 통과하려 한다 껍질을 뜯으면서
당신은 왜 나를 왜 밀어두는가 왜 빠져나가려 하는가 아직 살아있는 나무의 말
파고들면 슬픈 일이 생겼다
우리는 같은 판 위에서 사지를 물어뜯고 서로의 주름진 곳을 사랑했다 스토브 하나 없이 협곡을 걷던 족속이 사라진 곳
한때 오래 머물던 곳 같다
오목한 길을 따라 와 거기에서 기다릴께 물이 고이는 곳 아주 먼 곳부터 따라온
출혈하는 저 나무와 나는 어떤 관계야?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길에서 너를 만날 때까지 얼굴에 어둠 발랐다
나를 파줘 더 깊이 깊이 파고들게 하는 죄 많은 거기를
손미 시인 / 책상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책상이 걸어와 내 귀퉁이를 핥는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나를 읽는 책상 이빨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맨 몸으로 뒤엉킨다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온 것 같다
손미 시인 / 도플갱어
문을 닫자 이곳은 암전이다 우린 재채기로 서로를 알아봤다
새벽 네 시, 당신을 찾으려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데리러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알몸으로 한 칸씩 부서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움큼 집어 갔다
추락한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나 시계를 똑깥이 맞추고 헤어졌다 당신은 정전된 과일을 밟으며 갔다
당신이 조립한 마지막 칸 그 방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쌓인 사탕 더미에서 오렌지 주스가 흐르는 새벽 네 시 나는 야채 칸 모양으로 오랫동안 녹아 있었다
우리의 고향은 아주 먼 곳이지만 당신과 나는 딱 한 번 만나 발목에 찬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문을 닫으면 북반구의 어둠이 시작되고 이제 당신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손미 시인 / 양파 공동체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간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손미 시인 / 통근 기차
승객 여러분 뼈를 깨끗이 씻고 탑승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육류비빔밥을 먹을 것입니다 길이 없는데, 길이 끊겼는데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기차는 달리며 피부와 묶입니다 누군가 기차를 잡고 앞으로 밉니다 우리는 출발합니다 살러 갑니다 내 머리를 잡고, 꿈틀거리지 좀 마세요 너무 무겁습니다
숨을 참으면 연해질 수 있습니다 지퍼를 닫고 더욱 부드러워질 때까지 핏물이 빠질 때까지 썰기 좋은 고기가 될 때까지 한 끼의 밥이 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아침 출발하고 있습니다
기내식은 육류비빔밥 이 속에 흔들리는 이빨들 제발 움직이지 마세요 너무 무섭습니다
《현대시학》2014년 9월호
손미 시인 / 후박나무 토끼
매일 커지는 무덤과 같은 방향으로 뻗은 후박나무를 끌고
이상한 나라로 가지 않는 후박나무 토끼야 숲에서 비석을 산책시키는 후박나무 토끼야 날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 사는 후박나무 토끼야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발신자 번호를 지운 전화가 가끔, 아주 가끔, 오는 것은 후박나무 뿌리가 전하는 잠깐의 기척
나무를 알몸으로 통과하는 빗물의 통증
깃털을 잃은 후박나무 토끼야 우린 오래전에 만난 적 있지?
후박나무가 미처 후박나무이기 전에 후박나무 토끼가 후박나무 토끼이기 전에 나의 머리가 너의 머리이기 전에
언젠가 본 적이 있지?
검게 뜯긴 후박나무 나를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는
시끄러운 피가 흐르고
시집『양파 공동체』(2013)에서
손미 시인 / 몇 온스의 숲
올리브 병은 어디로 갔는가 피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떡을 구워먹으며 올리브 병과 단 둘이 있었어 나는 숲을 배반해서 긴 종이 되었고 여기 있는 누구든 나를 부릴 수 있었지
뺨을 쓸면 마른 떡이 한 가득 떨어져 이제 내 속에 너는 없는 것 같아
아침마다 병 속에 목을 집어넣고 출렁이는 올리브를 바라보았어
나무 의자는 밑동으로 올라갔고 여기에 있는 모두는 가장 친한 곳에서 투신하기로 했지
올리브 병을 흔들면 종소리가 나 머리가 부딪히며 숲 속이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
눈을 뜨면 붉은 비가 내려 이제 이 속에 나는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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