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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수피아 시인 / 은유의 잠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5.

수피아 시인 / 은유의 잠

 

 

썩어가는 나뭇잎처럼 나른한

은유에 누워 잠이 들었어

 

사람의 길이 보이지 않아

 

입산금지 후 숲에는

오지도, 가지도 않게 된

사람의 길이 사라지고

나무의 길, 꽃의 길, 벌의 길이 생겼어

썩어가는 나뭇잎이어서 새로 생긴 길이 좋아

오지도, 가지도 못하도록 사라져버린

길 위에

떠나버린 당신의 말[語]이

노란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걸 보았어

 

이제 당신과 다른 방식의 언어야, 나는

 

바람이 몸을 비틀어 깨울 때까지

은유에 누워 썩어가는 나뭇잎이거든

 

 


 

 

수피아 시인 / 가난한 눈으로 내린다는 것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내 생각 밖의 공기는 너무 어두웠어

이대로 숲으로 흩날리다 사라져 버려도 좋았어

여치가 여치에게 보내는 울음이

숲으로 배달되었지만, 네 울음은 없었어

밤새 울음 편지를 보내고 어디쯤인가

꼭, 당도할 것 같은 답장을 기다리다

날을 새곤 했어, 가을은

풀잎의 기억을 말리고 비틀어

바스러지며 걸음을 멈추었어

여치와 여치가 함께 사라진 것 같이

울음도 가을도 온데간데없는 지금은 겨울이야

쓰러지는 풀잎의 세상을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바람으로 살아도 좋았겠지만

가난한 등짝끼리 맞대고 누구의 삶이 더 가벼운가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였다가

햇살에 여지없이 녹아내리는 하루도

가만히 나쁘지 않다는 걸

내 생각 밖의 공가가 차가워져야 알겠어

 

시 전문지 『포지션』2019년 여름호에서

 

 


 

 

수피아 시인 / j에게

 

 

j의 등 뒤에는 벽이 있고요

창문 밖에는 뭉치 구름이 있어요

그리고 머리맡에는 간호사 호출 버튼

 

j를 상어라고 불러요

이가 없는, 눈이 안 보이는 상어에게

내 월급을 바닷물로 바꾸어 드려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아, 가계비

바닷물이 모자라서 상어가 허우적거리네요

 

소리 지르다 어디든 쓰러지고 싶은

나는 매미가 되는 꿈을 꾸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고 있는 매미

j의 침대 옆 창문이 가여워

흐리다가 뿌옇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

 

j, 등 뒤의 벽을 구름 위로 올려놓을게요

내가 회사가고 없는 사이 급한 일 생기면 버튼을 눌러요

벽이 흘러내리면 간호사가 뛰어 올거예요

 

(『포지션』, 2019년 봄호)

 

 


 

 

수피아 시인 / 권태 1

 

 

어쩌자고, 나는

j의 창가에 놓인 화분 같다.

목이 마르다. j의 창은

반복적으로

점점 어두워지거나 밝아진다.

인간은 자신의 가지를 뻗어

참새보다 이상한 소리로

한 번씩은 화분에 대해 짹짹거린다.

해독할 수 없는 얼굴들

너무 오래, 목이 마르면

이파리가 오므라들고 뻐근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내장이 썩는다.

심장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화분은

목이 마른 이미지의 것이 된다.

 

 


 

 

수피아 시인 / 거북이

 

 

스크린이 내려오고

불쑥 팔 하나가 공중에 튀어오른다

연이어 발이 굴러온다

뎅강 잘린 목을 보고 나서야

팔과 발과 목을 끌어당기는 몸통이 보인다

내재된 공간으로 잠들어 있는

안개는 도시와 건물과 나무와 거리와 사람을

잘랐다가 붙였다가 한다

한 토막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상영하는

이 도시는, 신이 던져놓은 자투리 시간이다

등원한 아이의 양말을 정리하며,

나는 간혹 양말을 빠져나간

발의 행방이 궁금하다

아이의 가방을

손으로 휘, 저어보고

새참 잠이 든 아이,

발이 보이면 이불을 끌어다 덮어준다

그럴 리 없겠지만, 핸드백 안에서는

내 팔자로 태어난, 사내

몸 주인은 어디 가고

막걸리에 취한 발이 자고 있다

모든 세계가 안갯속에서 뼈를 견디고 있다

 

 


 

 

수피아 시인 / 나무의 지도

 

 

손톱으로 껍질을 두드린다.

텔레비전에서

아이아이원숭이가

소리의 변화를 들으며

나무의 지도를 알아내고 있다.

 

네 등에 내 등을 붙이고 손톱으로 방바닥을 두드린다. 난데없이, 너는 살아 돌아온 독립군처럼 “이 나라를 망친 바퀴벌레를 처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미세한 진동을 가진 스피커에 귀를 대고 로스 판초스의 노래를 듣는다. 잡음이 많이 들리는 너의 지도는 흐리고 길은 뭉개져 있다.

 

나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앞니로 나무껍질을 벗기고

가운데손가락으로 껍질을 긁어내어

구멍을 만드는

아이아이원숭이를 보고 있다.

 

불쑥, 너는 “의식 없이 사는 벌레는 한자리에 모아놓고, 눈과 코와 귀와 입이, 살과 창자와 심장과 뇌가 자유롭게 흩어지도록 테러 하겠다”고 선언했다. 알수록 소름 돋는, 정신질환을 앓은 적 있다는 네 지도를 껴안는다.

 

아이아이원숭이가

손톱으로 유충을 찔러서 들어 올린다.

어느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코를 골며 이를 갈며

잠든 네 입에서

유충 짓이기는 소리 들린다.

 

 


 

 

수피아 시인 / 갤라다개코원숭이와 거미처럼

 

 

양분이 많지 않은 풀을

종일 뜯다가

뭉텅뭉텅 뜯긴 자리가

어둠으로 채워질 때에야

서식지인 암벽으로 돌아오는

갤라다개코원숭이처럼

 

건축현장에서 그는

무겁고 긴 파이프를 잇는

배관공 일을 마치고 돌아와

숙소에 눕는다고 했다

몇 해 전

위에서 떨어진

배관 파이프에 깔렸을 때

갈비뼈 금간 자리가

가끔 가렵다고도 했다

배관과 배관을 잇대며

땜질을 할 때

팔에 불꽃이 튀어 생긴

화상 흉터를 보여주며 그는

그 길로 올 것이라고 했다

어느 해

용접 기구에서 불이 솟구쳐

가스통이 폭발하여 사망한

동료와 같은 일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창가에 서서 나는

s자로 유연하게 구부러진

길을 바라보고 있다

나뭇잎 뒤에서

눈의 깜박임도 없이

집요하게

먹이를 지켜보는 거미처럼

 

 


 

 

수피아 시인 / 시간을 습작하다

 

 

틀에 끼워놓고 나를 거칠게 묘사하는, 연필 한 자루가 있는 저녁

 

발톱을 세우고 별과 별을 뛰어다니던 시절. 나는 밤을 새워 겨드랑이와 음부에 난 털 속의 시간을 만지작거렸지. 환하고 둥근 보름달을 핥아서 수박처럼 조각내는 밤이 반복되었어. 이제 밤은 내 이마에도 주름을 긋고 있지.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 친구들은 개울이나 산 아래 있는 샘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지. 누드를 그리는 화가의 붓 끝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어. 고양이 귀밑 털만큼 자란 털을 들키지 않으려 했던, 열두 살의 내가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왔지. 몸에 때가 끼고 머리에는 하얀 석회가 생겼다는, 화석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저녁. 가시내가 더럽다고 했어. 엄마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재깍거리는 시곗바늘처럼 가느다란 매를 쥐고 피멍이 들도록 때렸어. 구석에 웅크린 시간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지. 이제 와서 말이지만, 매를 맞더라도 열두 살에 털이 나고 열다섯 살에 가랑이 사이로 생리혈이 흐르는 시간을 구입하고 싶어. 어느 깊은 저녁, 잠든 엄마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보는 호기심도 시간의 어딘가에 있을 거야. 때려죽이고 싶은 엄마의 머리카락 같은 털들의 시간.

 

잘 세워 놓은 화구가 붙들고 있는 시간

 

 


 

수피아 시인

1967년 전남 고흥 출생. 본명은 박영란.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 졸업. 전남 고흥에서 출생. 2007년 계간 《시안》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