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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옥 시인 / 코끼리를 매단 모빌
혼자일 필요성 안에서 오래 머물다 꼬리를 물고 원을 맴돌다 모빌에 코끼리를 매달다 뒤뚱거리며 자전과 공전을 하다 코끼리 무게만큼 하루가 기울다
코스 벗어나다 몽롱한 새벽을 걸어가다 푸른 나팔꽃 깨어있다 너 발견하다 모르는 것은 새롭다 몇 개의 대물렌즈로 관측하다
보이는 것은 코끼리의 발톱쯤일 것 참나무 잎보다 많은 의심과 기대로 상상과 실제를 더듬다 너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다가가야 보이는 세계를 향해 저쪽으로 건너가는 귀뚜라미 새로운 꽃들의 이름을 묻는다
지금 보이는 것이 어느 부분의 세포일까 적당한 초점거리를 찾으면 너의 전체가 보일까 너를 알면 코끼리가 가벼워질까
신명옥 시인 / 0에 관하여
모든 생명력이 줄어들어 죽음에 가까워질 때 0은 나를 찾아오지 마음은 땅 위에 두고 몸은 지하에 묻은 채 0속에 들어간 나 기억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고 몸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분해되지 살아있으면서 0이 되는 꿈을 꾸고 있지 언제나 느껴지는, 흔들리는 존재와 홀로라는 수 하나에서 하나를 빼기 위해 나라는 욕망 내려놓고 꿈틀거리는 기억 뽑아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까지 0속으로 들어가지 처음엔 불안하고 두려워 어쩔 줄 모르지만 그것마저 놓아버릴 때 무한하고 영원하며 모든 것과 통하는, 비로소 본래의 0이 드러난다지
신명옥 시인 / 돈 후앙*과의 대화
어디로 가야 할 지 헤매고 있을 때 당신을 꿈에서 만났다 장밋빛 벨로아천에 아라비아 문자가 적힌 상자를 나에게 주었다 오래전 상자가 열리지 않아 떠돌았던 날들 떠오른다 끝내 그 상자는 열리지 않고 짙은 그늘을 남겨놓았다 저 부드러움과 신비함 속에 어떤 상형문자가 들어있을까 나는 올리브유와 석청에 티티새의 가슴털 섞으며 주문 외운다 붉은 향료 뿌리고 뚜껑을 시계방향으로 문질러도 상자는 생각에 잠겨 있다 대단한 비밀 갖고 있어서 의식의 순서가 틀리거나 정성이 조금이라도 모자란다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만월 뜨는 날 세 개의 검은 돌 위에 상자를 얹고 푸른 글씨로 쓴 주문을 촛불에 사른다 아홉 번 경배 드린 후, 리카락 잘라 금실로 묶어 올려놓았을 때 마법의 룬 문자가 뚜껑 위에 잠시 나왔다가 사라지며 상자가 열렸다, 신탁에는 마음이 담긴 길 따라 가라 적혀 있었다
신명옥 시인 / 사천왕 붉은 눈
마음이 시끄러워 조용한 곳을 찾아갑니다 수피무늬 신비한 모과나무로 새들이 날아갑니다 사자상 위에 엎드린 동자승이 낮달맞이 합니다 석등 아래 촛불맨드라미가 연못 속 연밥 바라보는 동안 마음 속 소리들이 묵언정진에 들고 애기해바라기가 금생今生의 첫눈을 뜹니다 예불 목탁 소리에 법당 앞 바람꽃 귀 기울이는 새벽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입니다 붉은 가사를 걸친 스님이 범종을 두드려 잠든 의식 깨우고 운판을 두드려 날짐승 날려주고 법고를 두드려 길짐승 풀어주고 목어를 두드려 물짐승 놓아주고 나서야 적조전寂照殿에 누운 금동와불이 열반에 듭니다 드므에 담긴 물안개꽃이 잔잔히 웃는 삼소실三笑室 앞에서 능현스님은 사바세계로 돌아가는 손에 잘 익은 꽈리 쥐어 줍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부엌 창문에 놓인 꽈리 두 개가 마음사원에 다시 소음이 깃들지 않도록 사천왕 붉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명옥 시인 / 안스리움
그녀가 출가出嫁했다. 함께 살아온 침대와 책상, 쓰던 것들 그대론데, 내 안에서 환한 기운 빠져나갔다
화원 앞 지나다 잎과 꽃이 하트형인 안스리움, 꽃잎이 싱싱해서 두 팔에 안고 왔다, 낯선 곳에서도 새록새록 나오는 잎, 윤기 흐르는 잎에 비친다, 홀로 두고 온 어머니
어머니에게 받은 낙원樂園 딸에게 건넸다, 출가出嫁란 또 하나의 낙원 이루는 일
그날 어머니도 내게서 출가出家했다. 출가出家란 불문不問의 세계에서 나를 비우고 타자와 하나 되는 일
잠시 세상에 머무는 목숨들, 본래 나 없고 내 것 없으니 지금 곁에 피어나는 안스리움, 이 아름다운 순간 즐겨야 하는 것이니
두루마리처럼 말린 잎 펼치는 하트 싸인, 내 곁에 있는 그녀에게, 나도 두 팔 올려 응답 한다
신명옥 시인 / 나 없고, 영원 없고, 순간 있는 날
‘이음카페’ 창밖에는 지하도에서 나오는 인파, 거리공연 찍는 중년여자, 법복 입은 스님, 쌍쌍 모여드는 젊은이들, 같은 보도 밟으며 나만의 시대, 나만의 세계 걷고 있지
세 개의 기둥 받친 지구의地球儀 아래 희노애락애오욕 드라마 상영 되는 곳 현수막에는 ?지금 이 순간을 느껴라, 영원이 그 순간 속에 있다
영원과 놀던 시절 떠올라 아름드리 팽나무 숲에 누워 그늘에 감도는 느리고 깊은 숨소리 듣던 날 경포해변에 앉아 뭉게구름이 펼치는 그레고르 드라마 감상하던 날 함박눈 내리는 반달마을에서 천왕성마을까지 걸어가던 날 처음 어머니와 기차 타고 외가에 가던 날
전조등 한쪽 눈 깜박이는 사이, 반짝이는 구슬 찾아 밖으로 밖으로 달리고, 환영 좇아 쥐라기 해저에 잠수하고, 착각에 눈 멀어 암흑성운 떠돌다
진열장에서 반질거리는 모닝빵 티라미수 향에 실려 오는 ‘집시의 노래’가 시선을 안으로 안으로 불러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의자와 마주하는 날 나 없고, 영원 없고, 순간 있는 날
운동과 정지의 반복 속에서 시간의 손바닥 맴도는 드라마, 늙지 않는 유리창이 물끄러미 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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