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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우 시인 / 깡통
나보고 깡통이래 축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고 머리가 텅 비었다고 형은 나만 보면 깡통 깡통 하는 거야
학교에서 오다가 깡통을 봤어 길 한복판에 떡 버티고 있는 거야 냅다 걷어찼지
일주일 동안 발에 깁스를 하고 다녔어 깡통은 무조건 비어 있다고 생각한 내 잘못이지 뭐
나를 뭘로 채워야 형이 조심할까?
심강우 시인 / 꽃이 피기까지
사전 속 낱말들이 심심해졌어요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아이들 꿈속으로 들어갔어요 글짓기 시간에 아이들이 낱말들을 끄집어내어 동시를 지었어요
공책에 갇힌 동시들이 심심해졌어요 새벽에 몰래 공책을 열고 나와 아이들 귓바퀴를 타고 들어갔어요
귓속 동시들이 심심해졌어요 귀를 씻기 전에 서둘러 아이들 머리로 들어가 악보가 되었어요
아이들이 심심할 때 귀에 익은 노래를 흥얼거려요
노래가 창문을 넘어가 가깝고 먼 꽃대를 흔들어요
자고 있던 꽃들이 깨어나요 울긋불긋 노랫말에 어울리는 색으로 피어나요
심강우 시인 / 일등이 두 명
공원에서 만난 친구에게 할머니가 내 자랑을 한다 공부도 일등 그림도 일등 노래도 일등 할머니 친구가 벙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번엔 할머니 친구가 손자 자랑을 한다 공부도 일등 그림도 일등 노래도 일등 할머니 친구의 손자 이름은 민규, 나랑 한 반이다
그래서 우리 반에는 일등이 두 명이다
심강우 시인 / 새들의 책
1
새들에겐 나무가 책인 거야 탐스럽게 핀 꽃은 제목이지 주렁주렁 달린 열매는 책이 주는 교훈 같은 거란다 숲은 그러니까 수많은 책이 꽂힌 책장인 셈이지
그러니 준기야, 조금 전에 너는 책 한 페이지를 찢은 거란다 저기, 고개를 갸웃거리는 오목눈이 좀 보렴 찢겨 나간 내용을 생각하느라 벌레가 지나가도 모르잖니?
2
선생님 몰래 준기는 책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간다 오목눈이가 마저 읽으라고 부러진 나뭇가지 조그만 돌로 눌러놓고 온다
심강우 시인 / 동백의 전언(傳言)
노을을 보면서 나를 생각지 말아다오 엄동설한에 세간의 길이 얼마만큼 짧아졌는지 철없는 동박새에게 묻지 말고 다만 오랜 눈빛으로 그 많은 흙손을 종횡으로 엮은 사철 곧은 잎사귀들 심장에 비끄러맨 푸른 기치旗幟를 기억해 다오
향기가 없다고 손을 젓지 말아다오 구애의 몸짓을 읽기에 내 심안의 조도는 너무 낮고 다행히 내가 머문 계절은 벌과 나비를 기르지 않고 나는 홀로 붉어 계절에 줄 서지 않으리니
나를 은둔자라 부르지 말아다오 섬을 통째로 물어뜯던 바람을 기억한다면 뒷산에서 벼랑까지 붉디붉게 노여움을 길들인 걸 기억한다면
낙화는 꽃에게 첫 단추,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그날을 위한 내가 나를 여미는 길이라는 걸 안다면 내 목으로 제단을 쌓는 이유도 알겠지
그러니 왜 동백인지 묻지 말아다오 붉다고 다 동백이 아닌 걸 안다면, 바람에게 피를 묻힐 순간을 주지 않는 부릅뜬 자결의 결심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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