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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우남정 시인 / 꽃에 대한 예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6.

우남정 시인 / 꽃에 대한 예의

 

 

 시들어버린 꽃을 버릴 때

 아직 향기가 남아 있는 저 꽃잎은 어쩌나

 아직 푸른 잎 매달린 저 뻣센 줄기는 어쩌나

 그것들 순하게 썩어버릴 동안

 기다려줄 땅 한 평은, 어디에 있나

 

 오래 입은 속옷을 버릴 때

 두 개의 젖무덤을 감싸던 브래지어

 꽃물 빠지기도 전 얼룩진 속곳에 남아 있는

 저 미열은 어디로 가나

 

 


 

 

[2018 새해 특집] 신춘문예(시)

우남정 시인 / 돋보기의 공식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눈(目)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우남정 시인 / 마트료시카

 

 

문 속에 문

 

뚜껑을 비틀거나 잡아당겨야 열리는

 

내 몸에는 문이 몇 개나 될까

나를 작동시키는 문을 바라본다

 

비밀을 간직한 창

잊어버린 비밀이 잊어버린 비밀을 기억해내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

 

비밀은 안녕한가

나는 어떤 번호로 해제되어야 속살을 보일까

이 문을 열고 저 문을 닫는 순례들

 

빈방의 얼굴이 창백하다

비밀이 나를 만진다

 

너의 표정은 언제나 굳게 잠겨 잇다

 

 


 

우남정 시인

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본명 우옥자).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으로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가 있음.  제16회 김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