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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균원 시인 / 콜로세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6.

양균원 시인 / 콜로세움

 

 

허물어진 것을

허물지 않는다는 것

그 위에 내려앉는 푸른 하늘에게

곁눈을 파는 사이

가이드가 굶주린 사자를 모사하고

선글라스와 모자들

세계 도처에서 온 연인들을 구경하면서

나 여기 왔노라, 증명사진은

생략하고 지나가려는데

딸아이가 다짜고짜 아내 곁에 세운다

땀투성이 검투사를 먼발치에 두고

오랜만에 단둘이 포즈

아빠의 말년을 위한 사진이야

엄마가 나중에 헤어지자고 하면

오늘 사진 꺼내 들고 말해

이거 보시오, 이렇게 다정했던

사라진 순간을 기억하시오

자아, 영원한 것은 없다, 치즈

훗날을 대비하는 신 김치 미소

위대한 폐허 앞에서

철컥

 

 


 

 

양균원 시인 / 딱따구리에게는 두통이 없다

 

 

순천만 습지에는

죽어도 아름다운 것들이 떼 지어 살고 있다

 

먼 곳을 오래 품어서

머리 조아려 바람의 길을 열어서

 

비로소 꽃이 피는 것, 아니 하얗게 새는 것

그런 갈꽃, 잠깐 내려보다가, 세 그루 연속 쪼아 대고 있다

 

찍는 소리보다 이후 떨림이 더 멀리 퍼져 가는

초저녁 동천에 구멍을 내고 있다

 

꽉 막혀도 텅 비어도

울림은 시원찮아, 땅끝에 가장 어울리는 소리통은

까막딱따구리가 쾌속 연타로 쳐 대는 벼락 맞은 은사시나무

 

살자고, 아니 다시 태어나자고, 애벌레가 파먹은 나무 속 어둠

썩은 자리 찾아 타진(打診)하고 있다

 

일침에 일침, 상처에 상처, 온 머리가 흔들려도

너에게는 두통이 없다

 

겨울의 심장, 후회 없이 찍어 댈 줄 아는 까닭에

 

 


 

 

양균원 시인 / 허공에 줄을 긋다

 

 

비가 내린다

때 앉은 눈금 띠를 따라

삼십센티 대나무 자로 세로 줄을 긋는다

한곳에 잠시라도 머물지 않게

다만 지나감의 흔적으로

줄을 긋는다

낮은 처마과 먼 산 계곡 사이

구겨지다 만 하늘

재생 용지에

살 같은 직선이 세세히 그어지면

연필심에 침을 묻혀 내리쓸 것이다

팽팽한 줄 사이 흔들리는 시공에

시를 쓸 것이다

먼 강바람에 기울지 않도록

옆 빗줄에 씻겨 흘러가지 않도록

이번엔 분명한 말씨로

허리 세우고 시선은 앞에 두고

그렇게 너에게 곧바로 가게

마음을 쓸 것이다

비가 내린다

 

 


 

 

양균원 시인 / 아름다운 유영(遊泳)

 

 

누가 공간을 비어 있다 했는가

출입문이 닫히면서

무대는 열리고

어둠에 에워싸인 빛 속으로

부지런히 제 위치를 바꾸는 먼지들

분장 없이 대사 없이

더 분명한 배역으로 움직이는 것들

떼지어 헤엄치고 있다

자리를 지켜 어두워진 것들 앞에서

빛의 간지럼에 너무도 유연하게 몸을 뒤집는다

기억 속의 망각처럼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다가

따라오는 스포트라이트에 몸을 돌려

갈기를 세우는 것들

뒤꿈치 굳은살처럼 발밑에 밟히다가

살아가는 나날의 틈새에 켜켜이 쌓이다가

언제고 홀로 일어나

머무른 자리에 연을 끊고

아무렇게나 떠돌 수 있는 가벼움

저 아름다운 유영

 

 


 

 

양균원 시인 / 내 방에 돌아와

 

 

콧속으로 몰려드는 것들

먼지인지 열기인지 냄새인지

콧물에 엉겨 바싹 말라붙는 놈들

콧구멍을 파고 귓구멍을 후벼야 할

새벽 한시의 간지럼에서

밖은 아직 싸늘한 초봄

방바닥 구석에 접힌 요를 그대로 폈건만

마침내 누울 자릴 찾았건만

물에 적신 수건 한 장으로

며칠째 말라비틀어진 것들

그 건조함 그 목마름을 축일 순 없었어

살갗을 가르고 일어나는 각질

허공을 껴안게 하는 맨살의 기억

창문을 열 수밖에 없었어

나를 가두는 것은 쉽지 않아

한껏 열어 제친 창문 다시 한 겹의 방충망

그 작은 격자들 틈새로

달궈졌던 공기

수천의 미립자가 일시에 밀려나가더군

낸들 그 바깥 어둠에 코를 박지 않을 수 있나

그렇게 서 있는 한동안 찬 공기에

아랫배가 탈을 예고할 즈음

거기 밤하늘에 날 버린 병신 같은 달이 떠 있었어

누군가의 창문을 닮은 마름모꼴 달빛이

불 꺼진 방바닥에 어느새 누워 있었어

오늘 그 달빛을 베고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양균원(楊均元) 시인

1960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어영문학과 졸업. 《광주일보》(1981)와 《서정시학》(2004)을 통해 시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허공에 줄을 긋다』(2012)와 『딱따구리에게는 두통이 없다』(2015)가 있음. 연구서로『1990년대 미국시의 경향』(2011)과 『욕망의 고삐를 늦추다』(2014)가 있음. 현재 대진대학교 영문과 교수이며 문예지 『문학청춘과 『시와 문화』 그리고 학술지  『현대영미시연구』 등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 지난 수년간 퓰리처상 및 전미도서상 수상자들을 주제로 발표하고 2014년 초부터 언어시(L=A=N=G=U=A=G=E Poetry)에 대해 연구 중임. <포지션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