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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진 시인 / 자루 속에서 -마임이스트 이정훈에게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온 너의 맨발 발끝까지 뒤집어쓴 허물 같은 자루
자루 속에 갇혀 있던 손들은 꿈틀거렸지 밖으로 새어나오는 말들의 숨소리 회색빛 새벽을 제치며 날아오르고 싶었을까?
커다란 거울을 허공에 그려 넣고 거울을 통과하는 거친 날개 소리 페루에서 날아온 바닷새의 울음을 닮았지
‘나는 랭보를 좋아했어요’ ‘서른네 살 이후에도 죽지 않았죠’
마임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너를 빠져 나간 날개는 종탑에 잠들어 있는데 그물 같은 모래언덕으로 달이 넘어갈 때 까지 집이 없는 새는 발가락을 떨고 있었지
너는 새에 미친, 뜨거운 새 크레이지 버드 어떠한 돌멩이도 날개로 만들지
네 나이는 밤과 같아 창밖으로 커다란 배낭을 지고 가는 새의 그림자 새들은 때때로 다른 별의 꼬리를 건드리고 간다
위상진 시인 / 묻어버린 시계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위상진 시인 / 빈 잉크통을 들고
잉크 충전 가게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프린터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고양이는 내 방문을 열심히 긁다가 문 앞에 오줌을 싸버렸다 닫힌 문들에 대한 기억은 본능에 각인 된 두려움일까?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미래에 경매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또 변덕 같은 비밀이 만들어지리라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셔터가 내려진 문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고 싶다 물감은 주목 받지 못한 표현주의자의 얼룩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문을 닫은 그들은 문을 빠져나간 걸까? 바깥에 의해 갇혀버린 걸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고 빈 잉크통만 어둠과 상관없이 남아 있다
위상진 시인 / 초승달
고양이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 너를 깨운다 끈적한 침을 발가락에 묻히고 지독한 근시로 너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검자주색 핏물이 든 발톱 고양이는 발톱 안에 혈관이 있어 무라노 섬에서 그가 보낸 초승달 모양 목걸이가 도착했다 밤하늘을 오려낸 오색 금빛 별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고양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발톱 모양의 목걸이를 건드려본다 무라노 섬에 유배된 유리공의 손길은 너의 목에서 흔들리고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 있다
위상진 시인 / 초현실주의
아무래도 코가 비뚤게 됐나봐 이 돌파리 의사! 다시 수술을 해 달라 해야지 거울 속의 여자는 분필 같은 코뼈를 바로 잡고 있다 한 밤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이들은 눈 코 입을 바꿔버렸다 창백한 얼굴은 어긋나지 않으려고 어긋나고 있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랑하고 헤어진 연인은 욕설을 퍼붓는다 참 멋진 놈이었는데, 나쁜 놈!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펴지지 않았다
위상진 시인 /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시차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 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까?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위상진 시인 / 중얼거리는 꽃
면도칼이 녹아내리는 문장 뒤에 서 본 적이 있나? 언젠부턴가, 그방은 파지가 쌓이기 시작했어 알 껍질을 깨고 프린터에서 빠져 나오는 꽃이 중얼거린다
너의 이마에 찍힌 번호 도마뱀의 잘린 꼬리 같았지
나는 몽유병에 걸린 듯 단어를 찾아다녔지 사라진 천재들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길때 처음 듣는 낱말의 침전물이 부유한다
뼈대가 부서진 소조 같은 문장 발가벗은 사람들은 연필로 그려진 도시를 지나며 아무 말도 흘리지 않았어
우린 범종에 낀 불협화음처럼 같은 책을 들고 다른 페이지를 뒤적였지 의심의 맨 끝에 도착하지는 못했어 충혈된 시계위로 폭설처럼 쏟아져 내리는 파지
누가 녹아내리는 면도칼의 문장을 알아챌 수 있을까? 1초도 자기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 시간처럼 바스락거리는 이파리 소리
도무지 닫히지 않는 귀 하나, 여기 있다
위상진 시인 / 불속의 비둘기
검은 봉지속, 귤이 해가 지는 쪽으로 쏟아질 때 그 불은 경찰서 뒷마당에서 시작되었죠
새들이 날개를 접는 시간 버섯구름에 싸인 비둘기 집
머리 위의 불꽃이 타다만 비둘기가 각목처럼 툭 떨어지며 비명도 없이 날아갔죠
호루라기 소리 어른거리는 불꽃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렸죠
나는 당신과의 거리를 사랑한 것이라고 잔느* 처럼 사라진 눈동자가 꾸는 꿈이라고 밤기차 유리창에 악착같이 달라붙은 사랑 어디까지 따라 왔을까요?
이제 당신의 눈동자에 불사조를 그려 넣고 싶어 불에 타다 만 비둘기는 니그로 조각 같아요
* 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 모딜리아니가 죽자 임신한 몸으로 투신했다
-시집 그믐달 마돈나<지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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