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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엄원태 시인 / 어두워질 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6.

엄원태 시인 / 어두워질 때

 

 

금호강 방죽 위를 걷는다

해는 저물었지만

잉크병 같은 박명薄明의 푸른빛이 있다

오래전부터 이 시간을 사랑하였다

강변 풍경엔 뭔지 모를 이끌림 같은 게 있다

어스름이란, 마음에도 그늘처럼 微微한 흔적을 남긴다

강바닥 버드나무들은 언제부턴가 둥근 무덤들을 닮았다

그때 너를 놓아 보냈던 게

내 손아귀 안간힘이 다해서였던가,

생각하면 모래알같이 쓸쓸해지지만 여한은 없다

해오라기 하나 물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있다

저대로 밤이라도 새우려는지,

가슴께에 보드라운 흰 털이 바람에 부스스 일어난다

새들도 저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가졌다

나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본다

버드나무에 걸린 지난 홍수의 비닐조각들은

내 등허리에도 틍증처럼 걸려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앟다

이제 곧 밤이다

 

 * 200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중에서

 

 


 

 

엄원태 시인 / 물방울 무덤들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고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저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엄원태 시인 /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목요일 늦은 오후, 텅 빈 강의실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몸피가 조그만 아주머니는 내게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손한 인사. 무슨 종류일지 짐작가는 바 없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결핍'이 저 아주머니 마음에 가득하여서, 마음 자리를 저리 낮고 겸손하게 만든 것이겠다. 저 나지막한 마음의 그루터기로 떠받치고 품어안지 못할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아주머니, 쓰레기들을 일일이 뒤적여 종이며 캔과 병같은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챙긴다. 함부로 버려진 것들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챙기는 사람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시인이다.

 

 


 

 

엄원태 시인 / 메간

 

 

 메간은 네 살 아이 몸피를 지녔지만 실제 나이는 열 살, 할아버지 같은 얼굴을 가졌다. 세상에 단 네 명뿐인 희귀병 '프로제리아’를 앓고 있지만, 아픈 내색 하나 없다. 이제 열세 살이면 다만 늙어서, 죽어야 한다. 하루를 두 달만큼씩이나 성큼성큼, 살아갈 터이다.

 

 할아버지 얼굴 메간, 생의 이슥한 골짜기와 깊은 그늘, 일찌감치 들여다보며 그것들과 함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아이 마음이다. 아이 마음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간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엄원태 시인 / 굴뚝들

 

 

  온산유화공단의 저 굴뚝들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病! 굴뚝들, 지상에서 가장 절실한 모습으로 외팔을 쳐들었다. 가장 높이 쳐들 수 있는 데까지, 저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해. 굴뚝들, 제 팔을 너무 쳐든 나머지 한쪽 팔만 남았다. 공장들은 저 굴뚝들 때문에 아주 어깨가 삐딱해지거나, 힘을 다해 용쓰느라 핏줄들까지 툭, 툭, 불거져나온 게다.

 

  불꽃을 태우는 굴뚝도 있다. 낮엔 그저 이글거리는 손짓으로만 보였을 굴뚝 끝의 화염. 밤 되어 어두워지자, 붉고 투명한 불꽃의 손바닥은 더욱 선명하고 애처롭게 흔들린다. 춤추는 불꽃의 손가락들은 파랗게 질려 있기도 하다. 나를 봐주세요! 그대여! 제발, 제발, 하면서.

 

 계간 <시향> 2004년 가을호

 

 


 

 

엄원태 시인 / 저녁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 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이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에 다름 아닌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 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엄원태 시인 / 애월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단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햇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 잡이 뱃불들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죽하던 초생달까지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둥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 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엄원태 시인

1955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 1990년 《문학과 사회》 에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침엽수림에서』『소읍에 대한 보고』등이 있음.  1991년 제1회 대구시협상과 김달진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