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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옥 시인 / 춘설
이 고장에서는 눈을 치우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봄도 치우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 요양 온 나는 그리움을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대관령 산비탈 작은 오두막 여기서 내려다보면, 눈 내린 마을이 하얀 도화지 한 장 같습니다 낡은 함석집들의 테두리와 우체국 마당의 자전거가 스케치 연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3월, 겨울이 긴 이 고장에서는 폭설이 자주 내리지만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여름도 가을도 치운 적이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처럼 눈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담뱃가게와 우체국 가는 길을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나도 山만한 그대를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山 아래 조그만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면사무소 뒷마당,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포클레인 한 대가 보입니다 지지난해 들여놓은 녹슨 추억도 이 고장에서는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 『현대시』, 2009년 4월호
유금옥 시인 / 대관령면 골지리 1리 2반
이 마을 공기에는 이빨이 있다 물어뜯기다 팽개쳐진 함석집들이 기우뚱, 나가떨어져 있다 산비탈이나 거름더미 귀퉁이 혹은, 외양간이나 개집 옆에
씨부렁거리고 앉아 있다, 무릇 거름더미란 잡초들의 싸움질이나 닭똥 쇠똥을 모아둔 것인데 목청 큰 이장 놈의 허드레소리도, 쿡 찔러 넣어둔 것인데 이곳 생활을
겨울 내내 푹푹 썩혀둔 것인데 이 쾌쾌한 풍경을 흩뿌리는 봄이면 밭이랑마다 시퍼런 산이, 쑥 올라오고 붉은 장화가 저벅저벅 피는 것이다 소와 개와 닭과
맑은 공기가 주민인 이곳에서, 나는 철통처럼 둘러싸인 산을 끼고 졸졸졸졸 맹물처럼 늙어간다
<시향> 현대시펼쳐보기. 2009. 가을호
유금옥 시인 / 나무와 나의 공통점
우두커니 서서 새소리 듣는 일, 종일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일
마른 혓바닥을 조금씩 부숴 새의 먹이로 주는 일 만나기 훨씬 이전인 듯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잊는 일
반달의 모서리에 맞아 머리를 다치는 일
다친 머리에 새집을 짓는 일 치매에 걸려서 내가 누구지? 거울을 보는 일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저울을 들고나오는 일
그래도 새알이 깨질지 모르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일
심심하면 햇살을 주물럭거려 꽃송이를 빚는 일
지나가는 봄바람이 기웃거리면 꽃을, 몽땅 거저 줘 버리는 일
꽃피우기 훨씬 이전인 듯 가랑잎이 들어 있는 신발을 신고서서
별을 바라보다가, 서서 잠드는 일
별이 꽁꽁 얼어 눈이 흩날리면 새하얀 종이 한 장 되는 일
새소리만 종이배에 태우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일
유금옥 시인 / 구름세탁소
대관령 산기슭, 울타리 없는 집 마당에 새하얀 빨래를 널어놓고 삽니다 뻐꾸기와 종달새가 우리 집을 물고 날아다니는 앞산에 구름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오늘 같은 날엔 산도 종잇장처럼 얇아져서 날아다닙니다
날아다니는 종이에, 종달새가 재빨리 적습니다 산더미 같은 인생은 이곳으로 가져오세요 어떤 찌든 때도 하얗게 세탁해 드립니다 - 구름 세탁소-
산 아래 뉴스를 물어 나르는 TV도, 지지직거리는 지상의 방송국보다 은하수방송국이 더 가까운 곳 이 마을은 새와 꽃이 사람들보다 똑똑합니다 종달새 지저귀면 보리 베고 뻐꾸기 울면 깨 심으며 삽니다 나는, 구름 세탁소 종업원
뻐꾸기와 종달새와 빨래를 하며 삽니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나는 헛간처럼 앉아 하모니카를 붑니다 사랑도 그대도 새하얗게 지워진 구름은 저 혼자 돌아다니며 잘 마릅니다
2010년,『현대시』,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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