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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국현 시인 / 걷다, 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6.

여국현 시인 / 걷다, 길

 

 

I

어두운 도시의 거리를

날개 다친 새처럼 허위적 거리며 걷다가

목덜미에 차갑게 내려앉는 물기에 고개를 들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파란색 원피스를 입었던 캐스터는 틀렸다

불길한 기운 가득한 지하 묘지의 입구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쏟아내는 지하철 입구에

무리지은 이들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듯

하늘을 보았다 땅을 보았다

몇몇은 맞은 편 버스정거장 쪽을 힐끔 거렸다

몇몇은 결심이나 한 듯 길을 나섰다

 

II

갈 곳이 있는 사람의 발걸음은 단호하고 가볍다

 

III

가볍고 단호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던 때가 있었다

걸어가는 걸음의 한결같음을 의심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길의 낯설음을 겁내지 않았다

가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주지 않아도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도

두렵지 않았다어디로 가는지 알고 걷는 걸음이었고

보이지 않아도 길은 있을 것이었으니

 

IV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어둠은 더 깊어졌다

자동차 불빛들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일기예보를 틀린 그 기상캐스터가

불안한 눈빛으로 내일의 날씨를 예보할 때 쯤

멈추었던 길을 다시 나선다

더 이상 단호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으로

 

V

눈앞의 길은 빗속에서 뿌옇고

마주 달려오는 바람은 얼굴을 따갑게 밀어대지만

걷는다

걸어야 한다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어디로라도

어기적거리며 걷는 걸음으로라도 멈춤 없이

걸어야 한다

가볍고 단호한 걸음으로 걷던 시절이 지났더라도

길이 연이어 길을 내어주던 시절이 지났더라도

 

 


 

 

여국현 시인 / 향기인들께 바치는 송가

 

 

시는 노래다

소리내어 불러주어야

비로소 훨훨 날아가는 날개 달린 음악이다

 

시는 향기다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풀어

포근하게 세상 감싸는 향긋한 바람이다

 

시는 우주다

풀씨 하나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말씨 하나로 세상을 하나되게 하는 신비의 빛이다

 

노래고

향기며

우주고

사랑인 시를

시인보다 정성들여 사랑으로 품어 안고

세상 하나뿐인 아름다운 목소리에 고이 실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대

아름다운 향기인들이여!

 

그대로 인해 시는

바람처럼 춤추는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그대로 인해 시는

사람 세상 가득 퍼지는 꽃향기가 되는구나

 

바람처럼

햇살처럼

달빛처럼

음악처럼

향기되고 노래되어

온 세상 가득 영원하여라!

사랑스러운 향기인들이여!

 

 


 

여국현 시인

1965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 방송대 영문학과 졸업. 중앙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 받음. 2018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 『크리스마스 캐럴』 등의 소설을 번역, 『하이퍼텍스트 2.0』 외 다수의 이론서를 공역. 현재 상지대 겸임교수 거쳐 중앙대, 방송대에서 강의.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