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영 시인 / 빗방울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하늘의 우물에서 떨어집니다.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한길 옆 웅덩이에 떨어집니다.
동그라미 그리는 빗방울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닮았습니다.
구정물 같은 검은 흙 속에서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민영 시인 / 집
이 집에 등을 대고 산 지도 어느덧 일흔 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집에 둥지 틀고 살았으나 이제는 그 집을 내가 지고 사는 형국이 되었다, 달팽이가 껍질을 지고 살듯이.
그러는 동안에 가위눌린 한 시대가 지나가고 진달래꽃 도라지꽃 번갈아 피더니 억새꽃 바람에 휘날리는 세월이 돌아왔다. 수많은 국토와 바다를 다녔으나 꿈 깨어 돌아보면 언제나 그 집이었다. 어린 새들 자라서 저마다 날아가고 늙어서 뼈만 남은 쓸쓸한 집.
그 집을 이제 피안까지 지고 가야 하나? 만 리 밖 하늘에서 천둥이 운다.
민영 시인 /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늘 약골이라 놀림 받았다. 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 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아버지 담배를 가져오라 시키고 어떤 아이는 나에게 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러 때마다 약골인 나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 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 어깨는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 비실대며 꽁무니빼는 아이도 있었다. 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그들이었다.
우리는 약골이다 떼밀리고 엊어맞는 약골들이다. 그러나 약골도 힘 뭉치면 힘이 커진다. 가랑잎도 모이면 산이 된다.
한 마리의 개미는 짓밟히지만, 열마리가 모이면 지렁이도 움직이고 십만 마리가 덤벼들면 쥐도 잡는다. 백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도 그 앞에서는 뼈만 남는다. 떼밀리면 다시 일어나자! 맞더라도 울지 말자!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주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우리 나라도 약골이라 불렸다 왜 놈을은 우리 겨레를 채찍질하고 나라 없는 노예라고 업신여겼다.
민영 시인 / 아내를 위한 자장가
아내가 몸져 누운 머리맡에는 알루미늄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아내 아내 아내여, 가엾은 아내 나흘 밤 나흘 낮을 꼬박 새워서 나흘 낮 나흘 밤을 열에 들떠서 아파서 할딱이는 너의 숨결은 쉬임없이 끓어 넘는 주전자 같구나. 빈 들을 달리는 기관차 같구나.
하지만 이 밤에는 잠이 들어라. 꽃밭 아닌 내 가슴에 머릴 묻고서 옛날도 그 옛날 먼 숲 속에 난쟁이 일곱이 사는 집에서 의붓어미 시샘에 꽃처럼 져 간 눈부시게 어여쁜 공주님처럼! 그러다 따뜻한 봄이 오거든 나뭇가지 가지마다 꽃이 피거든 아내여, 아내 아내, 어여쁜 아내 꿈 속에서 깨어나듯 피어나거라.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안나 시인 / 애월(涯月) 혹은 외 2편 (0) | 2021.08.18 |
|---|---|
| 길상호 시인 / 덤 (0) | 2021.08.18 |
| 정수경 시인 / by (0) | 2021.08.18 |
| 백무산 시인 / 생의 다른 생 외 3편 (0) | 2021.08.18 |
| 허연 시인 / 가여운 거리 (0) | 2021.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