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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민영 시인 / 빗방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8.

민영 시인 / 빗방울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하늘의 우물에서 떨어집니다.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한길 옆 웅덩이에 떨어집니다.

 

동그라미 그리는 빗방울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닮았습니다.

 

구정물 같은 검은 흙 속에서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민영 시인 / 집

 

 

이 집에 등을 대고 산 지도

어느덧 일흔 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집에

둥지 틀고 살았으나

이제는 그 집을 내가

지고 사는 형국이 되었다,

달팽이가 껍질을 지고 살듯이.

 

그러는 동안에

가위눌린 한 시대가 지나가고

진달래꽃 도라지꽃 번갈아 피더니

억새꽃 바람에 휘날리는 세월이 돌아왔다.

수많은 국토와 바다를 다녔으나

꿈 깨어 돌아보면 언제나 그 집이었다.

어린 새들 자라서 저마다 날아가고

늙어서 뼈만 남은 쓸쓸한 집.

 

그 집을 이제

피안까지 지고 가야 하나?

만 리 밖 하늘에서 천둥이 운다.

 

 


 

 

민영 시인 /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늘 약골이라 놀림 받았다.

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

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아버지 담배를 가져오라 시키고

어떤 아이는 나에게

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러 때마다 약골인 나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

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

어깨는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

비실대며 꽁무니빼는 아이도 있었다.

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그들이었다.

 

우리는 약골이다

떼밀리고 엊어맞는 약골들이다.

그러나 약골도 힘 뭉치면 힘이 커진다.

가랑잎도 모이면 산이 된다.

 

한 마리의 개미는 짓밟히지만,

열마리가 모이면 지렁이도 움직이고

십만 마리가 덤벼들면 쥐도 잡는다.

백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도 그 앞에서는 뼈만 남는다.

떼밀리면 다시 일어나자!

맞더라도 울지 말자!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주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우리 나라도 약골이라 불렸다

왜 놈을은 우리 겨레를 채찍질하고

나라 없는 노예라고 업신여겼다.

 

 


 

 

민영 시인 / 아내를 위한 자장가

 

 

아내가 몸져 누운 머리맡에는

알루미늄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아내 아내 아내여, 가엾은 아내

나흘 밤 나흘 낮을 꼬박 새워서

나흘 낮 나흘 밤을 열에 들떠서

아파서 할딱이는 너의 숨결은

쉬임없이 끓어 넘는 주전자 같구나.

빈 들을 달리는 기관차 같구나.

 

하지만 이 밤에는 잠이 들어라.

꽃밭 아닌 내 가슴에 머릴 묻고서

옛날도 그 옛날 먼 숲 속에

난쟁이 일곱이 사는 집에서

의붓어미 시샘에 꽃처럼 져 간

눈부시게 어여쁜 공주님처럼!

그러다 따뜻한 봄이 오거든

나뭇가지 가지마다 꽃이 피거든

아내여, 아내 아내, 어여쁜 아내

꿈 속에서 깨어나듯 피어나거라.

 

 


 

민영(閔暎) 시인

193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남. 1937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 1945년 간도성 화룡현 명신소학교 5년 중퇴.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斷章』(1972), 『龍仁 지나는 길에』(1977), 『냉이를 캐며』(1983), 『엉겅퀴꽃』(1987), 『바람 부는 날』(1991), 『流沙를 바라보며』(1996) 등이 있음.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1983), 만해문학상(1991) 수상.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시분과위원장 역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계몽사 편집위원. 독서신문 출판부 부장. ㈜학원사 편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