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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인 / 가여운 거리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생은 잠시 초라해졌다가 다시 화색이 돌기도 한다 경멸할 것은 없다. 어차피 다 노래니까
나는 이 위험한 계보를 알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약기운에 지친 환자처럼 얌전해지는 밤을 알고 있다
서리 낀 창밖은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선 답을 하지 않는다. 질문 속에 답이 있거나 혹은 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시의 동쪽에는 노숙인들이 낮 시간을 보낸 긴 의자들과 고장 난 그네가 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때 의자와 그네에는 새로운 색이 칠해져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거리가 파헤쳐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를 이해한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끔 새들이 태어났다.
도시는 자꾸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나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구타처럼 느껴진다 (나도 한 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도시의 거주민들은 비가 언제까지 내릴까 하면서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리에는 장례식이 있었다
-허연, 「가여운 거리」,『시로 여는 세상』,202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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