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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연 시인 / 가여운 거리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8.

허연 시인 / 가여운 거리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생은 잠시 초라해졌다가 다시 화색이 돌기도 한다

경멸할 것은 없다. 어차피 다 노래니까

 

나는 이 위험한 계보를 알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약기운에 지친 환자처럼 얌전해지는 밤을 알고 있다

 

서리 낀 창밖은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선 답을 하지 않는다.

질문 속에 답이 있거나 혹은 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시의 동쪽에는 노숙인들이 낮 시간을 보낸

긴 의자들과 고장 난 그네가 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때

의자와 그네에는 새로운 색이 칠해져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거리가 파헤쳐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를 이해한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끔 새들이 태어났다.

 

도시는 자꾸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나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구타처럼 느껴진다

(나도 한 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도시의 거주민들은 비가 언제까지 내릴까 하면서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리에는 장례식이 있었다

 

-허연, 「가여운 거리」,『시로 여는 세상』,2020 겨울호

 

 


 

허연 시인

1966년 서울에서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와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