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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시인 / 생의 다른 생
싸락눈 소복 담긴 낡은 새둥지 하나 키 낮은 싸리나무 기둥에 간신히 달린 집 한 채 봄날 근사한 집 짓고 예쁜 짝 만나 가족 이루고 재잘재잘 한철 살다 찬바람 속으로 떠나보냈네 뿔뿔이 둥지마저 버리고 긴 겨울 골짜기 나무처럼 울다
다시 봄날 처음 날듯이 날갯짓하네 새집 짓고 새짝도 만나 첫봄 맞듯 처음 살듯 다시 산다네 새들은 몇번의 생을 살다 가는 것일까
내게도 벌써 여러 봄과 여러 겨울이 지났네 지난 계절들 내 손으로 다 거두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나의 낯선 생이 바람 속 빈 둥지처럼 나뒹굴고 있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
내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 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 있네
나는 그걸 하나의 생이라고 우겨왔네 저기 다른 생이 또 하나 밀려오네
백무산 시인 / 누가 오시려고
봄비 무연히 내리네 땅속뿌리들 뒤척이게 해놓고 달뜬 흙냄새 아득히 들판에 풀어놓고 빗줄기 싸리비 다발로 정결하게 들판을 쓸어놓고 물안개 하얀 손길에 산허리 뒤척이게 해놓고
왜 이토록 비워두셨는지요 왜 이토록 비워두셨는지요
어쩌자고 이 마른 기억의 자갈밭에 숨은 낱알 하나 두근거리게 하고 저리 빈 것들은 다 어디서 불러내셨나요 어쩌자고 저리 들판 가득 펼쳐놓으셨나요 비워 이토록 두근거리게 하셨나요
누가 오시려고 누가 오시려고 이토록 비 가득 비워놓으셨나요
백무산 시인 / 창림사지
석탑 하나 마주하고서 저물도록 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오늘에서야 처음 본 탑이지만 탑은 나를 천 년도 넘게 보아온 듯 탑 그림자가 내 등을 닮았습니다
수억 광년 먼 우주의 별들도 어쩌면 등 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석탑 하나 마주하고 오래 서 있자니 나의 등이 수억 광년 달려와 나를 정렬하고 마음을 만납니다
옛사람들은 거울보다 먼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을 발명하였습니다
백무산 시인 / 내가 계절이다
게절이 바뀌면 뱀도 개구리도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몸을 바꾼다 보호색으로 변색을 한다 흙빛으로 또는 가랑잎 색깔로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나이도 묽어진다
흙에 몸을 감출 수 있도록 가랑 잎에 숨어 잠들 수 있도록 몸을 바꾸고 자신을 숨기지만
그러나 긴 고요에 들면 더이상 숨는 것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계절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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