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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안나 시인 / 애월(涯月) 혹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8.

서안나 시인 / 애월(涯月) 혹은

 

 

애월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서안나 시인 /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두 손을 씻으면

위로할 수 없는 손이 자란다

고통은 유일하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젖은 배를 끌고 황금의 도시로 가는 자들아

나의 인간과 당신의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울면 지는 것이다

홀로 남겨진 것은 우리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물속은 폭풍우와 풍랑이다

소년과 소녀는 물의 안쪽 높은 곳에서

비루한 지상을 위로한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물에 찔리고 물에 부딪히고 물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소년과 소녀들, 나는 한 잔의 물을 마신다

물에 젖은 눈과 손과 청춘을

물에 젖은 눈과 손과 청춘으로 닦아주마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바다나 읽는 나는 무력한 배경이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견고한 악몽이다

 

 


 

 

서안나 시인 / 등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서안나 시인

1965년 제주에서 출생. 한양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0년 《문학과비평》겨울호를 통해 등단. 1991년 《제주한라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으로 당선.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와『플롯속의 그녀들』이 있음. 평론집으로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동시집으로 『엄마는 외계인』. 현재 「현대시」「다층」「시산맥」동인으로 활동 中.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