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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미 시인 /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2.

정미 시인 /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사라진 인류 발원지에서 맴돌고 있는 눈의 전언

눈보라에 침몰하거나 거리를 서성일뿐

유적지 유물의 발굴 형태로나 쓰임을 짐작할 뿐

누구도 진열된 박물관의 생태 유물을 발견 못 한다

 

눈 내리깔고 보도블록 위에 툭 내려앉은 플라타너스 이파리처럼

축축한 쓰레기 더미 의자 위에 마네킹이 앉아 있다

이름 모를 거리에 나를 못 박아두고

따각따각 떠난 하이힐처럼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누군가는 포식자로 어둠을 먹어치우는

누군가는 발버둥 치지만 빛올가미에 사로잡혀 있는

 

그것을 구경만 하는 두 겹의 굶주림

혼란이 감추지 않는 약육강식의 폐허이다

 

표정을 놓아버린 폐허의 마네킹처럼, 나도

당신도 눈발과 함께 수만 세기를 침묵 농성할 뿐이다

 

허옇게 들끓는 코로나 속으로 한 발 더 깊이 한 발을 딛는다

우리는 저절로 도착하는 수십 세기의 유물이 되어간다

 

시집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상상인, 2021) 중에서

 

 


 

 

정미 시인 / 3월 폭설

 

 

  네 흰말은 휴식이 필요하단다 눈이 말의 속도를 얼게 했다 쉼은 어디 있지요? 휘갈겨대는 눈발이 소리쳤다 속사포 눈이 이렇게 말들을 쉬게 하는 걸 뭐, 중얼거리는 소리가 말 떼 갈기를 흔들어댔다 고속도로에 희디흰 털들이 쌓여갔다 끼익, 성질 급한 검은 말이 엎어지고, 몇 마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대는 말은 피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달리지 않는 말도 위험하죠 정지된 말안장에 앉아서 어떻게 일용할 밥을 벌 수 있겠어요? 저 뻐끔거리는 입들을 보세요 말먹이가 염려와 공포로 숨이 가쁘다 말의 옆구리만 차댔던 모양이다 회색말이 신경질적으로 울어댄다 너는 백 년 만에 비춰보는 내 마을이야 머릿속은 고립된 백 년 전 거울이에요 뒤돌아서 뭔가 보아야 할 게 있을 때 내가 정말 없었니? 지나간다 한 사람이 흰털을 쓸며 지나갈 때 말발굽 소리 요란하다 말들도 발굽을 떼기 시작했다 털들이 휘몰아친다 누구였을까? 길이 사라졌다고 느낄 때 백 년 전의 사람들이 복구되다니! 한 떼의 말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나의 흰말은 달려 지금 어디를 통과 중일까?

 

시집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상상인, 2021) 중에서

 

 


 

 

정미 시인 /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빵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 가는 길을 신발로 가로막지 마라

  끊어질 듯 가는 허리에 손가락을 얹지 마라

  죽을 때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

  개미 한 마리가 손등으로 오른다

  허리띠를 졸라매던 아버지

  바짝 마른 허기가 만져질 것이다

 

  아버지는 털털거리는 트럭을 끌고

  시골동네 비탈길을 누비고 다녔다

  생선 상자 위로 쏟아지는 땡볕

  신경질적으로 바퀴를 때려대는 돌덩이들

  왕왕거리는 메가폰 소리를 뚫으며

  흙더버기의 길을 아버지는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엔진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괜찮아, 내 허리띠를 붙잡아라!

  그날도 아버지는 쿨렁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손등에 오른 개미를 가만히 내려놓는 당신

  개미 앞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준다

  멀어져가는 아버지,

  당신의 눈 속으로 기어든 개미가

  시동을 건다 여섯 개의 다리가 붕붕거린다

 

200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정미 시인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전공. 200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와  그밖의 저서로는 장편동화 『이대로도 괜찮아』,『공룡 때문이야!』등과 청소년 장편소설 『마음먹다』(공저) 등이 있음. 2009년 아테나 아동문학상 대상 수상. 2013년 경기도문학상 아동소설 부문, 양평예술대상, 2018년 한국문학비평가회 작가상 수상 및 창작지원금 다수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