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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계영 시인 / 에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2.

유계영 시인 / 에그

 

 

깃발보다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의 그림자

깃에 기대어 죽는 바람의 명장면

 

새는 뜻하지 않게 키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알아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창밖의 무례한 아침처럼

그러니까 다가올 키스처럼

어떻게 두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혀의 위치처럼

새는 뜻하지 않게 시작된 것이다

 

새가 머무는 날

홀쭉한 빛줄기에 매달리는 어둠을 쪼며

짧게 나누어 자는 잠

 

그런 잠은 싫었던 거야

삼백육십오 일 유려한 발목의 처녀처럼

하나의 목숨으론 모자라

죽음은 탄생보다 부드러운 과정

 

새는 알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나는 알을 처음 본 게 아니지만

곧 태어날 새는 어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알 속의 혀가 입술의 위치를 짚어 보는

그런 명장면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6

 

 


 

 

유계영 시인 / 언제 끝나는 돌림노래인 줄도 모르고

 

 

불행을 느낄 때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탓하기

다지증의 발가락처럼 달랑거리는

다섯 아닌 여섯, 외롭지 않게

 

모르는 사람의 기념사진에 찍힌

나를 발견하듯이

 

오늘날의 태양은 상상의 동물이 되었다

 

아름다운 건 왜 죄다 남의 살이고 남의 피일까

강물에 돌을 던지고 물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던진 돌을 잊어버린다

 

컵 안을 응시하면서 컵에 담긴 것을 마시기

너밖에 없어 같은 말을 믿는 짝눈이 되기

 

안색이 왜 그 모양이냐

바깥에서 형형색색이 묻는다

잠든 사람의 감긴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에서

내가 거의 완성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요

 

꼭 길이 아닌 곳으로만 가려 하는 개와 어린이가

수풀 속으로 뛰어든다

검정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사라지면서 휘날리면서

 

나의 내부에 더 깊고 긴 팔이 나를 끌어안고

강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돌

여섯 아닌 일곱, 외롭지 않게

 

 


 

 

유계영 시인 / 드라마투르그

 

 

주렁주렁이라고 처음 쓴 사람과 주렁주렁이라고 처음 발음한 사람은 모르는 사이다

사과가 부재한 자리에 열린 입술과 사과가 몫으로 가져간 붉은 목젖이 서로 모르고 굴러간다

격심히 깊어진다

 

사과는 잘 씻고 잘 깎아 잘 씹어 잘 먹으면 사과이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허허벌판의 입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사과

 

내가 덮었던 이불에서 모르는 냄새가 났다

 

누군가 오늘 아침 나의 이불을 빠져나갔을 것이고

아마도 나는 아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의 몸집만큼 꺼져 있다

 

가볍게 잠든 자라면 가볍게 걸어 나갔을 것이고

무겁게 쓰러진 자라면 옆구리가 벗겨진 채로

끌려 나갔을 것 아직도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고

 

보도블록 위를 휘청거릴 수도

어쩌면 그게 나일 수도

사과일 수도 있다

 

꼬리를 흔들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간 개가 고개 숙인 사람이 되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어둠을 질질 끌고 갈 때면

오래 쓰다듬어준 후에

마침내 무엇이 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따뜻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공포를 무릅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근사한 기분을 느낀다면 당신을 다 큰 걸로 하자 다 큰

당신을 바라보는 모르는 눈동자가 있다고 하자

 

주렁주렁이라고 누군가 적을 때

가위를 들고 태양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다

 

빈 나뭇가지를 주렁주렁이라고 발음하면서

 

 


 

 

유계영 시인 / 시작은 코스모스

 

 

낮보다 밤에 빚어진 몸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병이 비치는 피부를 타고났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끔은 갈비뼈가 묘연해졌다

죽더라도 죽지 마라

발끝에서 솟구쳐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나의 바지다

나도 죽어서 신이 될 거야

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면

목과 너무나도 멀어진 얼굴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국기처럼 서로 마주 봤다

 

멀리서부터

몸이 다시 시작되었다

젖은 얼굴이 목 위로

곤두박질쳤다

 

 


 

 

유계영 시인 / 온갖 것들의 낮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나의 의문으로

 

빨강에서 검정까지

경사면에서 묘지까지

항문에서 시작해 입술까지

공원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자 화분이 넘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제 탔던 남자를 오늘도 탔다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제 먹어치운 빵을 태양이 등에 업고

나는 태양을 등에 업고

너는 나를 등에 업고

 

비둘기가 아주 잠깐 날아올랐지만

 

층층이 흔들렸다

공원의 한낮이 우르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유계영 시인

1985년 인천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온갖 것들의 낮』(민음사, 2015)과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현대문학, 2018)와『이런얘기는좀어지러운가』(문학동네,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