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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석종 시인 / 백색가루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2.

고석종 시인 / 백색가루 1

- 길 없는 강

 

 

 나는 뽕쟁이다.

 번뜩이는 눈빛에 늘 감시당하고 있다.

 

 두루마리 휴지 뜯어

 송송 뚫린 가슴을 꼭꼭 막는다.

 살갗에 핀 열꽃 속에서 스멀거리는 벌레

 떼끼*가 스쳐간 구멍난 주머니

 이미, 연줄도 끊어졌다.

 지하실 계단을 오르내리며

 가루로 흩어진 빛을 찾아 허우적거리지만

 메아리가 오지 않는 절벽만이

 앞에 있을 뿐이다.

 

 한순간 터져버린 볼록 거울,

 조각난 목련의 선혈은 조금씩 숨이 가빠지고

 멀어져간 울음 밖으로

 갓난아이 호흡은 끝내 들리지 않는다.

 앞만 보며 사람들은 강을 건넌다.

 

 알을 낳고 떠난 이슬의 여인, 드로소필라*,

 내 등짝은 하얀 알집의 곳간이었다.

 

 *떼끼 : 소매치기 *이슬의 여인 : 과실파리

 

 


 

 

고석종 시인 / 백색가루 2

- 질경이

 

 

우글우글

이끼 위로 기어 다니는 쓰레기 더미들

깨진 가로등 아래서 더듬이를 꽂고

연료통 가득 하얀 혈액을 채운다.

 

매캐한 떨, 습지에 자욱하고

움푹 패인 눈, 빛을 잃어 숨소리 거칠다.

 

그믐달 아래 질경이 풀

짓밟고 돌아서면 고개 들어

비릿하게 웃는

저 질기디 질긴,

 

TV꺼,

나를 들어오라잖아,

 

들어봐,

좀 벌레가 내 등을 갉아먹는 소리,

사각사각 들리지?

 

저건 누구야.

빨리 아스팔트 속으로 꼬리를 감춰.

파리 떼가 오고 있어.

에이 씨팔 떴군.

 

 


 

 

고석종 시인 / 백색가루3

- 유혹

 

 

 관목 줄기에 머물렀다가

 부드럽고 하얀 손길로 내 안에 들어온 그는,

 구름 속 침실에서 유희를 가르친다.

 

 작은 구멍으로 구름이 걸어오고

 하늘이 내게 안긴다.

 순간, 生의 조각들이 모든 허물을 벗어 던지고

 빛은 노래를, 소리는 춤을 부른다.

 나는, 광야에서 밧줄을 타고

 하늘을 오르내리는 야훼, 무지개를 걸쳤다.

 

 어둠의 그림자가 내 울타리로 내려앉는다.

 

 살려 주세요.

 제발,

 딱!

 한 모금만,

 

 핏발 서린 두 눈이 마황麻黃을 닮아가고

 먼지도 바람도 가루로 보인다.

 너,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모시나비 날갯짓 그 아래 깨진 조랑박,

 비늘잎의 증류수 0.03mg,*

 혈관을 검게 흐른다.

 

 


 

 

고석종 시인 / 이슬

 

 

덜커덩, 한 여자가 쇠 저울에 던져진다

이름은 정이슬, 나이는 서른다섯 가량

주소는 불명이며

키는 161, 몸무게는 52킬로이다

시큼한 포르말린 냄새

흰 가운을 입은 부검의들이

생의 집행관보다 먼저 그녀의 주검을 수납한다

날카로운 메스 끝에

스스스, 아랫배의 찌든 시간이 끌려나온다

떼어낸 살점 하나가

알코올 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고

끈질긴 톱날이 아득한 기억의 골짜기를 가른다

두개골을 빠져 나온 생각의 무게는 1,232그램

끈적거린 뇌수가 톱밥에 섞여 흐를 즈음

죽음의 사신이

부검실의 삐뚜름한 벽시계를 타고 내려온다

나는 주검을 분해중인 강력팀 형사

그 끝을 붙잡고 있다

거기 어디쯤

그녀를 앗아간 쾌락의 그림자가 있지 않을까

검붉은 생을 잇댔던

뒤틀린 끄나풀들을 쓸어 담은 부검의가

몇 땀 바느질로 그녀의 마지막 생을 봉인한다

갈라진 혓바닥, 쇳물 섞인 단내가 난다

세상은 하나의 사체부검실이다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죽음으로 갈 수 없다, 이슬처럼

 

 


 

 

고석종 시인 / 폐옥의 뜰

 

 

강 지느러미를 거슬러 오른 달빛

잔주름 켜켜이 밀어 올려도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

눅진 바위벽에 거꾸로 서 있는 박쥐

어둠을 솟구쳐도

죽지를 접어야 함을 모를 리가 있나

캄캄히 스러져 간 하늘도 봤으니

고통을 이겨야지

삐걱거리는 문틈으로

한줄기 빛이라도 들어오려는가

이제 그만, 골목을 떠나야 할 때

빛을 좇아가는

영글지 못한 내 영혼의 발자국들

모든 걸 다 버리고

나를 세우려면

거미줄 엉킨 폐옥의 뜰인들 어떠리

껍데기로 살아 왔던

나를 안고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고석종 시인

1955년 완도 고금에서 출생.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으로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한국문연, 2010)이 있음. 현재 현대시회, 경찰문인회 회원이며 전직 서울영등포경찰서 마약수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