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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하 시인 / 생강 발가락
저건 뿌리다 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다 너덜겅 걷다가 매운 다리품이 감췄다가 비어져 나온 생각,
식구들 잘 보듬고 가만히 나가 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 아내의 걸음새에 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 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이다
권덕하 시인 / 정육
오늘은 소 잡는 날 현수막 붉은 너털웃음에 파묻히는 깜깜한 속살 달빛 좋은 데로 두 근만 주시오 에이 여보, 달빛 치고 좋지 않은 데가 어디 있수 초승달에 오금 저리며 제 몸에서 기름덩이와 뼈 찬찬히 발라내는 밤
권덕하 시인 / 데칼코마니
경계란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 본다 노랗게 불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 숨바꼭질처럼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 견디지 못하는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권덕하 시인 / 나뭇잎 신발
처음엔 지축이 기울어 신발 닳는 줄 알았네 푸른 비늘에 바람 들면 웃음도 그냥 가벼워지는 줄 알았네 허나 시간이 이울수록 숨 깊었던 달빛도 흐릿해지고 뻐꾸기 울음도 등뼈를 슬슬 빠져나가 물관이 시나브로 마르는 것이었네 증상은 점점 심해져 습했던 속눈썹도 어리둥절해지고 작은 바람에도 염기 없이 실실 웃는 것이었네 숨 가쁘게 살아도 자꾸 주눅 들어 옆으로 드러눕기도 하고 자신을 마셔버린 취객처럼 지그재그로 걸으며 가끔 구름 발자국이라도 찍어 보는 것이었네 자전과 공전의 징한 삼백예순 어느 날 로또 가게 지나다 물컹한 혜성이라도 만난다면 그 꼬리 덥석 잘라 닳아진 곳 깔창으로 괴어보고 싶은 생각도 왜 드는 것이었네 나 활엽수는 이름만 화려하지 걸음이 비정규직 팔자라 신발이 바깥쪽으로만 닳는 것이어서 열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겨울을 맨발로 견디어 가는 것이었네.
권덕하 시인 / 보리
보리밭에 서서, 나는 보리 서릿발로 출가하여 마음 물길질하는 수도승, 밟힐수록 시퍼렇게 살아 오르는 질경이, 풋사과에도 가슴 설레는 가시내, 깜부기로 속 타는 머슴애, 텅 빈 대공마다 무너져 내리는 풀피리, 까끄라기로 간지럼 태우는 강아지풀, 황금빛 낱알로 재잘대는 종다리, 눈시울 배어 있는 막내의 종아리, 구부정한 허리로도 투정 받아낸 어머니의 고무신, 노을에 생 매단 아버지의 관절염, 함지박에 고추장 비벼 먹던 여름밤의 꽁보리밥, 아 맥박으로 톡톡 영글어 가던 나의 유년아
보리밭에 서면, 나는 보리
권덕하 시인 / 물고기와 수초
물고기가 헤엄칠 때마다 지느러미는 펜이다 옆줄의 미세한 구멍 지나온 물고기의 물짓 만년필 잉크처럼 고만고만한 기포 이뤄 수면 위에 풀린다 시퍼렇게 배 뒤집고 있는 언어들 힘들게 살았던 물고기의 멍이다
어항 속 유리에 뿌리 둔 수초들도 마음 미끄러지며 원고지 채워왔을 것이다 굽은 빛살에 단어가 흔들려 세상 어지러울 때도 숨 막히는 자갈에 문장이 짓눌려 온몸 옥죌 때도 부르튼 글 보듬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물고기가 수초 지나며 안부 토닥인다 수초가 지나는 물고기의 등 어루만진다 서로의 날숨이 서로의 들숨 된다
함께 견딘다는 것 서로에게 팬 되어 주는 일이다 함께 산다는 것 서로에게 숨 되어 주는 일이다.
권덕하 시인 / 주머니의 힘
주머니 만드는 일하는 그녀의 웃음소리 도회지의 아침 여네 새떼들의 빛나는 날갯짓이네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저 어린 날 여치와 방아깨비의 푸른 날갯짓 주머니 속에 한데 비벼 넣어 웃음 빛깔 토해낼 줄을 가을 들녘 콩깍지 터지듯 웃음보 터트릴 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스팔트 기어가는 초록 애벌레의 투명한 속살 쳐다보며 벌거벗은 웃음 웃을 줄을 공장 지붕으로 이륙하는 비행기 엔진소리 같은 재봉틀 돌리며 꿈처럼 훨훨 웃음 날릴 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동복 만드는 공장에서 재봉 일하는 열아홉 그녀가 주머니 달 때마다 반 지하 유리창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을 단칸방에 간간히 들려오는 풀벌레소리를 주머니 속 가득 집어넣어 삶 박음질하며 웃을 줄을 주머니 만드는 일하는 그녀의 웃음소리 도회지의 하루 마감하네 새떼들의 차분한 귀향이네.
권덕하 시인 / 점자, 그녀가 환하다
봐라, 점자 그녀가 환하게 피어나고 있잖니 흑점이 툭툭 부호 교란하며 농간 부릴 때만 해도 점자, 저렇게 환하게 피어날 줄 몰랐잖니 열다섯 달덩이 점자, 이울고 환해지기까지 볼우물 깊숙이 수많은 월계수 심어 가꾸는 수고 왜 없었겠니 디딜방아 같은 우묵한 어둠들 통째로 찧어 손끝에 날염도 하고 부르튼 입술에 흐드러지게 꽃씨도 뿌려보며 살아도 그믐이었을 어둠 몰아내기까지 캄캄한 세상과 왜 창창히 마주하지 않았겠니 점자, 그녀 지문에 노란 달맞이꽃 묻어나기까지 새들이 찍어대는 모호함의 발자국에 주파수도 맞춰 보며 두려움과 설렘의 안테나 잘게 썰어 마중 나가던 수고 왜 없었겠니 이제는 그믐도 보름이고 보름도 보름인 점자 문워크로 환하게 꽃길 걷고 있잖니 봐라, 점자 머리핀에도 둥글게 꽃은 피어나고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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