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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을 시인 / 봉숭아
꽃그늘 길게 눕고 단내 나는 해가 숨고르기 하는 저녁 봉숭아 꽃잎 한 줌 돌멩이로 찧는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의 뺨이 먼저 물들었다
무명실 동여맨 가녀린 손가락은 꽃잠에 들고 손톱 위 꽃잎은 밤새 두근두근 설렘으로 그네를 탄다
열세 살, 소녀의 아침이 웃는다 아릿한 아픔에 뒤척이다 깬 하얀 이부자리가 와락 꽃물 들었다.
이가을 시인 / 뚝도, 그 섬에는
뒤둥그러진 바람의 뼈가 수시로 찔러대는 갯가에는 직립의 시간 속에 핏기 없이 누워 있는 낡은 몸뚱이의 폐선 하나 못 자국마다 울컥울컥 뻘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루 두어 번 뱃전을 두드리는 바닷물이 귀에 대고 물결의 말이라도 할라치면 바다에 나가고 싶어 들리지 않는 귀로 물소리를 만지고 있다
푸석한 몰골로 일몰을 읽고 어둠이 슬어놓은 아스라한 별이 긴 꼬리 달고 뱃전까지 오는 시간 큰 파도에 베여 생채기 난 몸으로 멀미하는 비릿한 꿈을 꾸고 또 신열로 헛소리하다가 그리움에 떨며 잠이 들곤 한다
뱃전 너머 바다는 희붐한 어둑새벽을 불러 물비늘을 깨운다 그때였을 것이다 폐선에게서 낮은 울음소리 웅 웅 터지던 때가, 한발자국 움직일 수 없는 설움에도 입 벌린 채 설레는 아침을 함구하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파랑波浪에 몸을 맡기고 홧홧하게 쏟아놓는 아침 해 가슴으로 받게 옛날을 허물어 새로이 돌려주고 싶은 폐선의 꿈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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