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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을 시인 / 봉숭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3.

이가을 시인 / 봉숭아

 

 

꽃그늘 길게 눕고

단내 나는 해가 숨고르기 하는 저녁

봉숭아 꽃잎 한 줌 돌멩이로 찧는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의 뺨이 먼저 물들었다

 

무명실 동여맨

가녀린 손가락은 꽃잠에 들고

손톱 위 꽃잎은 밤새 두근두근

설렘으로 그네를 탄다

 

열세 살, 소녀의 아침이 웃는다

아릿한 아픔에 뒤척이다 깬

하얀 이부자리가 와락 꽃물 들었다.

 

 


 

 

이가을 시인 / 뚝도, 그 섬에는

 

 

뒤둥그러진 바람의 뼈가

수시로 찔러대는 갯가에는

직립의 시간 속에 핏기 없이 누워 있는

낡은 몸뚱이의 폐선 하나

못 자국마다 울컥울컥 뻘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루 두어 번 뱃전을 두드리는 바닷물이

귀에 대고 물결의 말이라도 할라치면

바다에 나가고 싶어 들리지 않는 귀로

물소리를 만지고 있다

 

푸석한 몰골로 일몰을 읽고

어둠이 슬어놓은 아스라한 별이

긴 꼬리 달고 뱃전까지 오는 시간

큰 파도에 베여 생채기 난 몸으로

멀미하는 비릿한 꿈을 꾸고

또 신열로 헛소리하다가

그리움에 떨며 잠이 들곤 한다

 

뱃전 너머 바다는 희붐한

어둑새벽을 불러 물비늘을 깨운다

그때였을 것이다 폐선에게서

낮은 울음소리 웅 웅 터지던 때가,

한발자국 움직일 수 없는 설움에도

입 벌린 채 설레는 아침을 함구하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파랑波浪에 몸을 맡기고

홧홧하게 쏟아놓는 아침 해

가슴으로 받게

옛날을 허물어 새로이 돌려주고 싶은

폐선의 꿈이 아프다.

 

 


 

이가을 시인(소설가, 시낭송가)

경기 남양주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졸업.1998년《현대시학》에 <못 박는 집> 외 9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봄, 똥을 누다』(한국문연, 2000)와 『저기, 꽃이 걸어간다』(동학사, 2004)가 있음. 1999년 문예진흥원 작가기금 수혜. 2004년 문예진흥원 작가기금 수혜.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