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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환 시인 / 스미다
밤이었고, 당신의 창 밖에도 비가 내렸다면, 그 밤에 걸어서 들판을 건너온 새를 말해도 되겠다 새는 이미 젖었고 비는 줄곧 내려서 빗발이 새의 몸속으로 스미던 일을 깊은 밤에는 새를 따라온 들판이 주춤주춤 골목 어귀로 스미던 일을 말할 차례겠다. 골목 모퉁이 가등 불빛 아래로 절름거리며 걸어오던 새에 대하여 새 언저리에다 빛의 발을 치던 빗발과 새 안으로 스미던 불빛에 대하여 웅크렸고 소름 돋았고 가는 뼈가 내비치던 새의 목숨에 대하여도 또는 새 안에 고이던 빗소리며 고여서 새 밖으로 넘치던 빗물과 그때, 전신을 떨며 울던 새 울음에 대하여도 말해야겠다. 그 밤에 새가 자주 넘어지며 어떻게 걸어서 당신의 추녀 밑에 누웠는가를 불 켜들고 내다봤을 때는 겨우 비 젖지 않은 추녀 밑 맨바닥에 새가 이미 스민 자국만, 축축하게 젖어 있던 일을
- 현대시학 2008, 1월호
위선환 시인 / 나무 뒤에 기대면 어두워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무 뒤로 날이 저물더니 나무 뒤가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나무 뒤에 기대어 바라보는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인데 그렇게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쪽에서 하나씩 돋아나는 불빛들이 실은 어두워지면서 더욱 닦이는 그리움인 것을 눈치챈 지 오래다 이제는 저무는 하늘보다 빠르게 사람이 어두워지는 때에 이르러 헤아린다 왜, 그리움에 기댄 사람은 마침내 뼛속까지 깜깜해지는가를 그리고 사람의 안쪽에서 불빛 돋는 저녁이 언제부터였는가를
위선환 시인 /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등성이로 바람이 불자 나무들이 골짜기로 내려오더니 그늘이 깊어진 산자락에 멎었다. 며칠이 더 지나가고 해가 짧게 저물면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창이 있는 방에 불을 켤 것이고 갈 곳이 없는 사람은 나무 뒤에 남아서 바람 지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밤에는 별빛이 지상의 모든 둥지에 닿으며 새들은 솜이불처럼 두텁게 잠을 덮는다.
여러 날을 찬이슬에 젖는다. 무릎을 말리고 앉아서 나는 고요하다. 하늘은 깊고 구름은 아주 멀리까지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해져서 나무 꼭대기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가지 아래로 한 잎씩 잎이 지는 것을 바라본다. 내 묵은 머리칼 틈에서 먼지 같은 살비늘이 떨어진다.
한 사람을 오래 기다린다. 가까이 머물던 사람들이 더러 죽고 어떤 이는 내 손으로 묻었다. 산그늘에다 잎사귀들을 죄다 묻고나서 고독해진 나무들이 흰 뿌리를 옮기며 강으로 걸어오고, 강바닥에는 물이 돌아오고, 나무들은 강가에 늘어서서 물끄러미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후가 되어서야 강에 하늘이 비치고 비늘구름이 돋아나서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그들은 돌아다보지 않았다. 강물에다 징검다리를 띄우고, 징검다리 밑에 하늘과 구름과 물그림자를 깔고, 돌팔매가 둥그렇게 그려둔 물무늬도 깔고, 물소리를 재우며 건너가서는 내내 적적해졌다. 강의 이쪽 기슭이 길게 비었다. 차츰 뒷산 등성이에서 바람이 자고 골짜기를 더듬으며 어둠이 내려오고, 강 건너편에서는 나무들 꼭대기가 한줌씩 검어지더니, 어두워지면서 이내 보이지 아니할, 이제는 캄캄해진 나무들 사이로 한 사람이 몸을 들이밀고 있다.
위선환 시인 / 두근거리다
첫째 날, 종달새는 내 발등을 밟았다. 무릎을 가슴팍을 이마를, 끝내는 정수리를 밟더니 날아올랐다
종달새는 내려오지 않았다. 둘째 날도 위로만 날아올랐다. 날갯짓에 털린 빛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셋째 날, 종달새는 구름층을 지났다. 검은 구름과 흰 구름 틈새에 잠깐 날개가 끼었다
넷째 날, 종달새는 뱃바닥에 찍힌 검정색 줄무늬와 줄무늬 아래에다 움켜쥔 까만 발가락 마디들만 보였다. 거기를 공중이라 했다.
다섯째 날, 종달새는 허옇게 센 속눈썹 털 몇 낱과 흰 눈빛만 보였다. 거기를 하늘이라 했다.
여섯째 날, 종달새는 점만 찍혀 있었다. 거기를 하늘 밖이라 했다
일곱째 날, 종달새는 보이지 않았다. 배나무 가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강이 흘러갔다. 배 밭에 일제히 배꽃이 피었다
장마철이 왔다. 풋배를 매단 가지들은 우레가 지나가는 순서대로 비를 맞았다. 흘러내린 빗물이 내 발등을 적셨다
가을이 가고, 떨어진 잎들을 긁어모아 드러난 뿌리를 덮어주는 손이 보였다
내일은 추울 것이다. 배나무 뿌리와 가지와 가지에 얹힌 강줄기도 얼고 종달새는 하늘 밖에서 얼 것이다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차고 어둑한 머리 위에, 구름층에, 공중에, 하늘에, 하늘 밖까지 빛기둥이 섰다. 빛기둥이 받치고 선 아뜩한 높이가 보였다. 그때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거리는 것이다! 두근두근거리는, 저어, 아뜩한 높이를 두근두근거리며 쳐다보았다
위선환 시인 / 혼잣말
나는 더디고 햇살은 빨랐으므로 몇 해째나 가을은 나 보다 먼저 저물었다 땅거미를 덮으며 어둠이 쌓이고 사람들은 돌아가 불을 켜서 내걸 무렵 나는 늦게 닿아서 두리번거리다 깜깜해졌던, 그렇게 깜깜해진 여러 해 뒤이므로 저문 길에 잠깐 젖던 가는 빗발과 젖은 흙을 베고 눕던 지푸라기 몇 낱과 가지 끝에서 빛나던 고추색 놀빛과 들녘 끝으로 끌려가던 물소리까지,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 모여 있겠는가 그것들 아니고 무엇이 하늘의 푸른빛을 차고 깊게 했겠는가 하늘 아래로 걸어가는 길이 참 조용하다 사람의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더디게 오래 걸어서 이제야 닿는구나 목소리를 낮추어 혼잣말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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