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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시인 /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푸르스름한 침낭 속에서 아아아, 기지개를 켜며 필라멘트처럼 눈을 깜박였다. 박사님, 물결을 일으켜줘요. 내게 감동을 불러일으켜줘요.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박사님은 굿모닝, 내게 또 오늘 하루를 기념하며 뽀뽀를 해주죠. 오늘은 18세기 초, 내일은 21세기 말이래요.
나의 사랑은 자살을 선언한 사이보그, 그의 숭고한 정신을 사모하기 위해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흰쥐들은 나날이 무섭게 살이 찌는데요, 박사님, 박사님, 내일쯤엔 흰쥐들이 우리의 마차를 끌 수 있을까요?
오늘은 18세기 초, 나의 거대한 사랑은 더러운 망토를 펄럭이며 저토록 고독하게 걸어가요. 내일은 21세기 말, 우리들의 결혼식이 있어요.
박사님, 박사님, 실험실 밖에서는 아무도 실험을 하지 않나요?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나서, 첫울음 대신 첫사랑 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님은 굿바이, 굿바이, 나의 미래를 축복해주시겠죠.
나는 아직 작은 가슴이지만은요, 쿵, 하는 소리는 땅에서 하늘까지
김행숙 시인 / 어두운 부분
내일 저녁 당신을 감동시킬 오페라 가수는 풍부한 감정과 성량을 가졌다. 예상할 수 없는 감정까지 당신에게.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이 사실일 때에도. 내일까지 바닥을 끌고 가는 긴 드레스 속에는 발목이 두 개, 곧 끊어질 듯. 젖도 크다, 곧 터질 듯.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은빛 칼처럼 빛이 올라오는 틈새가 있다.
김행숙 시인 / 화분의 둘레
이 작은 화분 한 개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꽃을? 꽃과 잎을? 꽃과 잎과 벌레를? 나는 화분의 세계를 망칠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플러그를 뽑듯이 나는 화초를 뽑아 던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물이 끓지 않고, 이제부터 조용해져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전화선을 자르듯 너의 줄기를 자르고, 이전과 이후가 각각인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나는 가장 가난한 삶을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라고 생각했습니다.
발자국이 없고, 물이 없고, 짹짹짹 새소리가 없고, 엄마가 없고 엄마가 없는. 엄마 없이 떠있는 지표면에서. 한 명의 아기도 울지 않는 별에서 살아가는 어떤 삶, 열렬하고 고독하고 게으른 삶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장 넓은 화분의 둘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걷다가 걷다가 지구에는 골목길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 몇 개를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습니다. 내일도, 라고 생각했습니다.
김행숙 시인 / 연애편지를 쓰자
어둠을 동그랗게 오려낸 스탠드 불빛 아래서 꿈결처럼 너도 언젠가 그런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옛날 연애편지를 쓰자
이 연애편지에서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밤바다의 등대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매우 어려운 것을 꿈꾸는 눈동자나 노래하는 심장과 함께 그때 우리는 열렬해 외롭기도 해 그랬지, 나는 오래전에 너의 창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다 갔지
세게 두드렸으면 유리창쯤 깨졌을 텐데…… 피도 봤겠지 너도 봤겠지 오버over하는 건 연애의 본질일까, 실수일까
지우개는 아직 하얗고 밤중에 밀려나오는 지우개 가루는 검다 모래로 쓴 글씨처럼 애써 지울 필요도 없어! 우리는 내일 또 지워진 후에 아주 옛날식 연애편지를 쓰자
김행숙 시인 / 얼굴의 탄생
어둠이 몰려서 온다. 녀석들. 녀석들 검은 비닐봉지 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면서 찢어지는 얼굴을 툭, 하고 떨어지는 물체. 죽은 건 줄 알았는데 개의 죽음은 또 아주 멀었다는 듯이 발을 모아 높이 뛰어오르고, 착지와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선상에서 음표처럼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 아닌 바퀴들이 지나가고
오른쪽 어깨 위에 어둠, 왼쪽 어깨 위에 어둠, 나는 어깨인지 어둠인지 녀석들인지 나는 나에 한정 없이 가까워
나는 거의 끝까지 멀어지고. 어둠에는 초점이 없으리. 녀석들의 노래. 잔치를 위해 돼지가 돼지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분할되고. 환하게. 남녀노소 고기를 씹는다. 이빨 사이에 고기가 끼고. 그러나 고기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나는 코만 남아서 정신없이 냄새를 맡는다. 냄새의 세계에는 비밀이 없으리. 녀석들의 노래. 녀석들의 코. 돌출적인. 뭉툭한. 냄새는 약 기운처럼 퍼져 여기 오래 있으면 냄새를 잃게 돼. 우리들은 장소를 옮겨 코를 지키자. 어둠이 우리를 벗겨내는 곳으로
툭, 다른 곳에 떨어지는 물체처럼 죽은 건 줄 알았는데. 녀석들 어둠 속에서 얼굴을. 얼굴을. 나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김행숙 시인 / 가로수의 길
플랫폼에서 서서히 떠나는 기차처럼 지나갔지 그래서 너는 참 길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기차처럼 너는 다음 칸을 가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어 그 외에는 가진 게 없다는 듯이 기차에 대해 생각하고 너에 대해 생각하고 길거리에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모자를 내려놓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들이 가장 크게 입을 벌렸을 때 땅이 조금 흔들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가로수와 가로수의 간격은 법으로 정해져 있을까, 발과 발을 모으고 서서 뾰족한 자세로 그런 생각을 해 가로수와 가로수의 사이는 다정한 곳일까 무서운 곳일까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는 자동차 사이에 대해 생각하고 치어 죽은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로부터 너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경적소리가 되고 싶어 모두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이 도시를 텅 비웁시다 미래에 유령이 되어 돌아오자, 다신 돌아오지 말자, 사이에서 유령의 감정을 생각해내려 애쓰며 거울을 보다가 유리를 보듯이 너를 높이 높이 떠올리며 걸어갔어 유리창은 어떻게 박살이 났을까 유리에서 맑은 하늘까지 너는 참 길구나, 그렇게 생각이 길어져 맑은 하늘에서 물속에 잠긴 도시까지 화염이 애타게 포옹한 우리들의 도시까지
김행숙 시인 / 당신과 당신
당신과 당신은 u와 U 너희들은 커플링 같구나 나는 당신을 끼고 당신은 당신을 끼고
비스듬한 오후에는 다 같이 비스듬하게 정면으로 오는 차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연인들의 짧은 이름은 폭죽 대낮을 배경으로
내가 아는 연인들의 가장 긴 이름은 일주일 후 나의 에세이에는 주제가 없고 나에겐 이름이 없다 없는 것들의 목록을 당신과 당신이 당신과 당신을 우르르 탕탕 노래하고
저 난동을 어린이처럼 지켜보는구나 조용해진 당신과 당신은 W와 w 사이사이에 모가지 없이 서 있구나 나는 당신을 당기고 당신은 당신을 당기고
우리들은 나누어 가진다, 천진하게 당신과 당신은 공연에 참여한다 거짓말을 할 때도 천진하게
김행숙 시인 / 옆에 대하여 2
이제 말 울음소리는 뚝 그치고,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 있으렴. 커튼을 치고, 갈기와 바람에 대해 떠들렴. 나도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애.
옆엔 어떤 아이가 누워 있을까요? 왜 모두들 내게 잠을 권할까요? 내 무릎에 알코올을 발라준 여자도 그랬어요. 그녀는 날아갈 것처럼 청결해요. 그리고 나는 앞발을 들고 서 있었어요.
양호실은 쓰러지기 위해 오는 곳이야. 저 아이처럼. 저 아이 옆에 누워서 종이 칠 때까지 앞발과 갈기와 바람에 대해,
한 마리 말과 두 마리 말에 대해, 한 개의 침대와 두 개의 침대에 대해, 흐르는 강과 달리는 산에 대해, 떠들어도 좋다고 여자는 내게 미소를 보냈을까요? 커튼을 치고,
알약을 다시 세기 시작하는 여자와 침대를 나란히 누운 아이들.
김행숙 시인 / 침대가 말한다
나는 침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작은 삐걱거림도 모두 나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 그러나 도마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파 뿌리처럼 발이 잘렸다고 소리치는 건 나를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진실로진실로 이 순간만큼은 네가 대파의 아픔에도 공감한다는 것인가.
너는 왜 모든 문제를 네게 끌고 들어오는가. 오늘 너는 식칼처럼 누워있다. 침대는 어느 연인을 눕히듯이 너의 어린아이를 붑히듯이 식칼도 눕힐 수있다. 너는 내 위에서 무엇을 저미고 다지고 마침내 팔을 높이 쳐들어 내리치고 있는가. 언제나 너의 침대는 모든것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싶다. 나는 너의 팔이 펜과 이어지고 노트와 이어지고 긴 이야기와 끝없이 이어지던 밤을 기억한다. 아침에 스르륵 잠이 들었고 가장 밝은 한낮까지 이어지던 꿈을 나는 이어가고 싶다.
그러나 거울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너는 침대를 독차지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침대의 기억을 무시한다. 내 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너는 상상하지 못한다. 너는 한 장의 시트를 갈면 모든 게 지워지는 줄 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는 순간에 남긴 무의미한 음절을 나는 기억한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의 단어인가. 죽음의 입술로부터 가능성을 이어받은 음절과 다음에 올 음절은 빛처럼 갈라져서 먼 곳으로 떠났다. 그것은 무한한 문장이 되고 우주처럼 무한한 편지가 된다. 나는 그의 똥오줌도 기억하고 그의 말년의 사랑도 기억한다. 나는 사랑하는 한 쌍의 몸들을 솜털까지 기억한다. 잠을 청하는 인류는 최종적으로 제 몸을 누일 땅을 파듯이, 오오 죽음을 핥듯이 다른 몸을 탐하고 미워하고 곡해하고 그리고 가장 외로워한다. 잠의 사전에 중단은 없다. 잠은 불꽃과 같아서 너희의 엉덩이는 앗, 뜨거워지는 것이다. 내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정든 육체가 동굴처럼 깊어지던 순간들을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듯 나는 그릴 수 있다. 작은 몸을 괴롭힌 욕창이 그가 잠든 사이에 더욱 장엄해지듯이 너희는 어디라도 더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왜 너는 외면하는가.
너는 참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이 돌아 눕는가. 혼자서 너는 연극을 하는 것 같다. 누가 너의 대사를 썼는가. 나는 무대인가. 어둠 속 팔짱을 낀 관객인가. 그러나 어느쪽으로 돌아눕든 그것은 오직 너의 문제, 그것이 오늘의 고독이다
침대는 인간적인 변덕과 무관하다. 나는 언제라도 어디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연약한 너는 하루도 지치지
김행숙 시인 / 눈사람
왜 나는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까? 햇빛이 비치면 왜 나는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났을까?
눈사람은 좋겠다.
시간이 펑펑 남아도네. 눈보라처럼 어지럽게 아이들은 자라고 눈사람은 점점점 자란다. 눈사람이 작아졌다! 엄마가 죽었다. 내가 예뻐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죽었다. 눈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에 나는 점점 이상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자세히 좀 말해줄래? 요즘은 거울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나직 아직 남아 있는데 마치 다 녹았다는 듯이.
내 눈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마치 찬장에서 설탕이나 기름병이 사라졌다는 듯이 사소하게 나는 시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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