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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린아 시인 / 불안의 사생활
누군가의 변기나 빨간 다리미와는 다르죠
이 작품은 당신이 가고 싶은 모든 곳에 데려다 줄 수 있어요
13각 기둥을 가진 고대 신전에 현대식 금고를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온갖 낙심의 숫자들을 돌돌 말아 담배처럼 후! 불어 보낼 수도 있지요 내가 가진 중독들을 한데 모아 태우고는 빼앗긴 시늉을 할 수도 있어요
불안은 그렇게 네일숍으로 가고 물어뜯어 울퉁불퉁해진 손톱에 영감을 받아 아무개 화가의 누드로 가요 벌거벗는 일이 우아해질 수 있는 건 보석들의 조건이죠 누드는 또 남자에게 가고 턱수염이 자랄 동안 여자에게 가지만 환심은 언제나 모든 방향으로 가죠 여자는 콧소리를 내며 콧수염으로 가요 콧수염은 음악을 받아쓰기 위해 극장으로 가지요 바흐나 멘델스존의 음악을 들으며 성스러운 아침을 떠올리다가 이불 속으로 이불 속으로
모두가 기립할 때 앉아 있게 된다면 Lascia Chio Pianga!* 아무도 모르게 무대의 중앙으로 가지요 관중은 관종이 되고 모두가 웃을 때 날 울게 하소서!*
테두리가 낡은 패션잡지를 모아 한 방에 태워 비리면 더 멀리 욜로(You Only Live Once)라 불리는 길목에서 정신과 의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정체성을 찾아 자존감으로 데려다 줄 거예요 누군가는 신의 계시를 외치며 언덕 너머 산타페로 가자고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낮에는 갈 수 없지요 하드락 카페와 벌레스크극장 간판에 불이 켜지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의 몸은 모든 사람의 냄새가 되고 밤새 정원을 할퀴는 고양이들의 등짝 위로 점프!
사랑이라 쓰고 꺼내먹는 노래로 가요 누구의 미움에도 뻔뻔해질 용기를 갖겠다며 결국, 책장 속으로 가지요 끊임없이 주소를 옮기는 일,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를 읽고 나를 옮길 수 있나요?
오리농장 주인을 찾아가 잃어버린 개를 찾아달라고 하소연하거나 60층이 넘는 빌딩의 담을 넘겠다며 허리가 휘어져라 요가를 하거나 비행기 속에서 잃어버린 이틀을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타거나 매일 오고가던 언덕의 오르막만 기억하는 일,
진실을 찾는 일은 불행이 정해진 장소만 찾아다니지요
*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서 십자국전쟁의 영웅 리날도의 연인 알미레나가 적의 궁전에 갇혀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며 풀려나기를 기원하는 비탄의 노래다. 이탈리아 시인인 타소(T.Tasso)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 한국어로는 “울게 하소서”이다.
시 전문 계간 《발견》 2020년 봄호
이린아 시인 / 덤불
분절이 없는 몸엔 작고 검은 덤불, 주머니쥐가 비좁게 숨어 있어요
볼펜 속에선 몇 명의 웅크린 언니가 나올까요? 이곳에서는 몇 명의 곡선을 가진 언니가 나올까요? 정면의 뼈마디마다 주머니쥐의 변명처럼 꽃잎은 분명 필 테지만 언니는 지금 어느 곳을 산책 중인 걸까요
심심한 낙서 속에서 언니는 실선이 되고 언니의 꽃들은 배꼽이 돼요 언니의 배꼽과 덤불들, 실선은 허리를 지나고 또 허벅지를 지나요 꽃이 피는 곳은 몇 개의 점선으로 문질러요
이지러지고 번지는 언니는 겹겹이 돼요 숨기는 것은 부끄러운 정면들이지만, 숨기는 것들로 우리는 먹고 살아요
시선의 방식은 언니를 재현하지 못해요 유니폼을 걸친 사람은 목적을 잃고 말지요
나는 나에게 잠깐 눈길을 주던 꽃잎들을 문질러요
언니는 언제나 곡선이고 펜을 든 나는 어쨌거나 늘 변주니까요
이린아 외, 『시인동네』 2019년 1월호 , 시인동네, 2019, p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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