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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건청 시인 / 목동 아파트단지를 지나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7.

이건청 시인 / 목동 아파트단지를 지나며

 

 

그 마을에

노새를 기르는 집이 있었다

그 마을 고샅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외딴집

봄이면 흰 연기처럼 살구꽃 피던

동네 머슴

복동이네 집

헛간에

귀가 크고

큰 자지를 단

짐승이 살았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그 노새가 언제 하품하는지를

보러가곤 하던

연둣빛 날들이 있었다.

 

* 노새 : 말과 당나귀의 교배종. 생식 능력이 없음.

 

 


 

 

이건청 시인 / 먼 집

 

 

굴피집에 가고 싶네.

굴피 껍질 덮고

낮은 집에 살고 싶네.

저녁 굴뚝 되고 싶네

저문 연기 되어 퍼지고 싶네

허릴 굽혀 방문 열고

담벼락 한켠

아주까리 등잔불 가물거리는

아랫목에 눕고 싶네

육전소설 읽고 싶네

뒷산 두견이

삼경을 흠씬 적시다 가고난 후

문풍지 혼자 우는

굴피집에 눕고 싶네

나 굴피집에 가고 싶네.

 

 


 

 

이건청 시인 / 새야

 

 

새야

작은 새야

손가락 한 마디만한 새야

풀씨 몇 개 따 먹고

우는 새야

풀씨 몇 개 먹은 힘으로

삐, 삐이익

우는 새야

오늘은 여기서

울지만

내일엔

어디 가서

울래

 

 


 

 

이건청 시인 / 민들레

 

 

황야였다.

간이역 목조 의자에 아버지와 딸이 앉아 있었다.

기차를 세우기 위해

아버지가 수동의 시그널을 내렸다.

작은 등짐을 진 딸이 말했다.

꼭, 정식 결혼식을 올릴게요.

그래, 거기도 잡혀온 랍비 한 사람쯤은 있겠지.

아버지가 말했다.

멀리 연기를 뿜으며

기차가 오고 있었다.

딸이 가난한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건강하세요. 딸이 말했다.

기차가 오고 있었다.

사이베리아, 유형지에 갇힌 사내 찾아가는

딸이 있었다.

 

 


 

 

이건청 시인 / 저무는 날이 다가와

 

 

말이 한 마리 쓰러지고 있다.

뒷무릎이 꺾이고 서서히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긴 목을 흔들고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었다.

갈기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울고 있었다.

하반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서서히 뒷무릎이 꺾이고

잠시 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핏빛 노을이 걸리고, 적막한

들판이 하나 엎드려 있었다.

저물녘이었다. 말이 한 마리

쓰러지고 있었다. 뒷무릎이 꺾이고

서서히

앞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건청 시인

1942년 경기 이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同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선. 1970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외에 다수 있음. 시선집에『해지는 날의 짐승에게』가 있음.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