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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현미 시인 / 어항골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7.

안현미 시인 /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골목이 부레처럼 부풀어 올라 고장 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벙, 여자는 의족(義足)을 벗고 부풀어 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 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비틀비틀 퐁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 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골목 고장 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퐁퐁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안현미 시인 / 마침표

 

 

자하문 고개를 넘어갔지요 서쪽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는 세검정(洗劍亭)에 도착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요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뜨는 곳이고 당신이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지는 곳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 세상의 모든 아침과 저녁이 있지요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이죠 그녀가 맨발로 다다르고 싶어했던 천상의 시간일지도 모르고 그가 가지 않았으나 꿰뚫어 본 0시의 어둠일지도 모르는 채 그것은 그렇게 그냥 이미 내게 도착했거나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아프지 말아 내가 원한건 그게 아녔어라고 말해주기에 나는 당신 때문에 아픈 걸 테지요 이

제 마음을 도려낸 칼을 씻고 그렇게 그냥 세검정처럼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안현미 시인 / 가령

 

 

1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전생(前生)이었다

 

2

가령 당신이 수원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시다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고 합시다

당신은 까무룩히 졸았다고 합시다

당신의 꿈속에선 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빗속을 달려오는 회색빛 자동차도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수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떠났던 것일까요?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始原, 시원은 오직 당신의 꿈속에만 있다는 걸

街靈, 당신이 믿는다면

나는 당신의 전생을 들고

다신의 꿈속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

 

3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후생(後生)이었다

 

 


 

 

안현미 시인 / 계절병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고 끝끝내 삶은 죽음입니다 거대한 고래처럼 거대한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시간을 밀거래하는 이 도시에서 서로가 서로의 휴일이 되어주는게 유일한 사랑입니다 병인을 찾을 수 없는 나의 우울과 당신의 골다공증 사이를 자객처럼 왔다 가는 계절 그 그림자를 물고 북반구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의 날개 같은 달력 한장 가없는 당신 나의 엄마들 왜 모든 짐승들에겐 엄마라는 구멍이 필요한지, 시간 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발원수 같은 건 아니겠는지 시도 때도 모르고 철없이 핀 꽃처럼 울다가 웃다가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고 계절을 바꾸어 타고 먼먼 바다로 헤엄쳐가는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제 그림자인양 쳐다보는 나무는 엄마라는 구멍처럼 고독합니다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포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

 

 


 

 

안현미 시인 / 해바라기 축제

 

 

 망루에 올라 해바라기 꽃밭을 본다 그 수많은 꽃들이 바라보는 태양처럼  사내는 눈부시다  해시계를 삼킨 황금 물고기 귀걸이를 찰랑대며  여자는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걸고 해바라기 꽃을 꺾듯 꺾어야 하는 게  있다면 몽롱한  눈빛의  유디트가 헬멧처럼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 같은 게 아니겠냐고 망루 아래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뱀은 서둘러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  밭을 떠난다  어느덧 태양은 엑셀파일의 함수마법사 중 시간의 함수로 구해놓은 듯 망루 꼭대기 위로 정각에 도착한다 목이 마른 사내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낸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기어히 목을 칠  테냐고 묻는다 여자는 축제는 축제니까, 라고 해바라기 씨를  깨물 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망루 꼭대기에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태양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자는 최면을 건다 레드 썬 탁! 그러자 뱀이 벗어 던지고 달아난 허물 속에선 화가의 잘린 귀와 귀를  자른  칼이  튀어 나온다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 순간 꽃밭에선 해바라기꽃들의 노랑 비! 명들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달아난 뱀은 깜짝 놀라 다시 허물 속 으로  달아난다 피크닉 바구니를  헬멧처럼  들고 여자는 망루를 내려간다 피크닉 바구니에선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의  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안현미(安賢美) 시인

1972년 태백에서 태어남. 서울여상을 졸업.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과. 2001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곰곰』 (렌덤 하우스, 2006)와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 2014)가 있음. 2010년 신동엽창작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