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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시인 /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골목이 부레처럼 부풀어 올라 고장 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벙, 여자는 의족(義足)을 벗고 부풀어 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 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비틀비틀 퐁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 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골목 고장 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퐁퐁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안현미 시인 / 마침표
자하문 고개를 넘어갔지요 서쪽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는 세검정(洗劍亭)에 도착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지요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뜨는 곳이고 당신이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지는 곳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 세상의 모든 아침과 저녁이 있지요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이죠 그녀가 맨발로 다다르고 싶어했던 천상의 시간일지도 모르고 그가 가지 않았으나 꿰뚫어 본 0시의 어둠일지도 모르는 채 그것은 그렇게 그냥 이미 내게 도착했거나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아프지 말아 내가 원한건 그게 아녔어라고 말해주기에 나는 당신 때문에 아픈 걸 테지요 이 제 마음을 도려낸 칼을 씻고 그렇게 그냥 세검정처럼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안현미 시인 / 가령
1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전생(前生)이었다
2 가령 당신이 수원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시다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고 합시다 당신은 까무룩히 졸았다고 합시다 당신의 꿈속에선 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빗속을 달려오는 회색빛 자동차도 있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시원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수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떠났던 것일까요?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始原, 시원은 오직 당신의 꿈속에만 있다는 걸 街靈, 당신이 믿는다면 나는 당신의 전생을 들고 다신의 꿈속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
3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후생(後生)이었다
안현미 시인 / 계절병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고 끝끝내 삶은 죽음입니다 거대한 고래처럼 거대한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시간을 밀거래하는 이 도시에서 서로가 서로의 휴일이 되어주는게 유일한 사랑입니다 병인을 찾을 수 없는 나의 우울과 당신의 골다공증 사이를 자객처럼 왔다 가는 계절 그 그림자를 물고 북반구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의 날개 같은 달력 한장 가없는 당신 나의 엄마들 왜 모든 짐승들에겐 엄마라는 구멍이 필요한지, 시간 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발원수 같은 건 아니겠는지 시도 때도 모르고 철없이 핀 꽃처럼 울다가 웃다가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고 계절을 바꾸어 타고 먼먼 바다로 헤엄쳐가는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제 그림자인양 쳐다보는 나무는 엄마라는 구멍처럼 고독합니다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포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
안현미 시인 / 해바라기 축제
망루에 올라 해바라기 꽃밭을 본다 그 수많은 꽃들이 바라보는 태양처럼 사내는 눈부시다 해시계를 삼킨 황금 물고기 귀걸이를 찰랑대며 여자는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걸고 해바라기 꽃을 꺾듯 꺾어야 하는 게 있다면 몽롱한 눈빛의 유디트가 헬멧처럼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 같은 게 아니겠냐고 망루 아래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뱀은 서둘러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 밭을 떠난다 어느덧 태양은 엑셀파일의 함수마법사 중 시간의 함수로 구해놓은 듯 망루 꼭대기 위로 정각에 도착한다 목이 마른 사내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낸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기어히 목을 칠 테냐고 묻는다 여자는 축제는 축제니까, 라고 해바라기 씨를 깨물 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망루 꼭대기에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태양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자는 최면을 건다 레드 썬 탁! 그러자 뱀이 벗어 던지고 달아난 허물 속에선 화가의 잘린 귀와 귀를 자른 칼이 튀어 나온다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 순간 꽃밭에선 해바라기꽃들의 노랑 비! 명들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달아난 뱀은 깜짝 놀라 다시 허물 속 으로 달아난다 피크닉 바구니를 헬멧처럼 들고 여자는 망루를 내려간다 피크닉 바구니에선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의 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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