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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석 시인 / 소화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7.

김정석 시인 / 소화기

 

 

단 한 번의 불길을 위해

터지도록 제 몸에 압력을 채우고

사는 소화기, 당신

 

또 헛방이다

 

제대로 한번 쏘아보지도 못하고

실금실금 빠져나가는 압력처럼

 

이 웃음

이 세월

당신

 

소화기 하나 들고 거기 벌서라

내가 불 지를 때까지

 

 


 

 

김정석 시인 / 전디다

 

 

'견디다'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데

'전디다' 하면 가슴까지 뻐근해져서

'전디다'라는 말이 좋다

 

볼트와 너트가 입 앙 다물고 상대를 전디듯

바이러스가 어지럽힌 세월을 전디고

세월이 빠져나가는 나를 전디고

 

당신을 전디고

 

-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 천년의 시작, 2020

 

 


 

 

김정석 시인 / 제련

 

 

식힐수록 제 몸이 달아오르는 게

사랑이다

천 도로 달군 쇠가

초속 이십 미터로 달린다

빨갛게 달굴 때는 언제고

너무 달아올랐다고 두들겨 패며 물을 뿌린다

단단해져라

질겨져라

그대 만날 몸을 만들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여름도 겨울도 여기는

천 도 언저리,

살다가 그게 그거다 싶어지면

여기 와서 보는 거다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으면

확 부어

쇠로 굳혀 버리는 거다

 

 


 

 

김정석 시인 / 의령 2

 

 

망개덩굴처럼 뻗어있다

읍내의 길이라는 건 살아온 사연대로 자라는 거라

우측으로 돌아서 와도

좌측으로 돌아서 와도

화신라사 사거리 망개떡 가게 앞에서 만난다

열고 들어오는 사람도 편하다

닫고 나가는 사람도 편하다

기사식당 문짝은 이렇게

조금씩 비틀렸으니

아무리 툴툴거려도 상관없겠다

손님보다 객식구가 더 많이 모여 밥을 먹는다

밥 한 숟가락에 말 세 숟가락씩이다

허름한 숟가락 통이나

오래된 주전자

여기서는 서툰 서울말로 주문해도 들키지 않는다

자꾸만 터지려는 웃음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의령에서는 다 웃어버리면 안 된다

망개잎 뜯어 꼭꼭 감싼 망개떡을

슬쩍 내밀면 그게 마음이다

 

 


 

 

김정석 시인 / 매물도

 

 

한껏 치장하고 온 사람들 배에서 내린다

매물도 길은 실밥 터진 청바지다 울긋불긋 아웃도어다

여길 가도 저길 가도 툭툭

웃음이 터진다

바다를 향해 소리치면 묵묵부답인데

대답을 들은 것 같다

길이 언덕을 넘어

더 못 가고 쌓인다

절벽이다

절벽을 등 뒤에 세우고

한 남정네 마지막 오줌 한 방울

털어낸다

빨간 동백 꽃물이 든 길바닥이 봄볕에

진저리 친다

길이 걸어간 멀리 수평선이 입을 꾹 다문다

 

 


 

 

김정석 시인 / 화암사에서 쫓겨 나왔다

 

 

절집 개 밥그릇은 깨끗하게 비어있다

공양간 신발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잘 있나요

화암사에서는 작게 말해도 멀리 간다

알몸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

더 씻을 것 없어도 또 씻는다

자꾸 씻는다고 면박을 줘도 씻는다

밥그릇을 씻고

소리를 씻고

손을 씻고

씻고 씻고 씻고 돌아 나오는 길

공양간 모퉁이에서 누가 보고 있다

한 번은 더 와야겠다

 

 


 

김정석 시인

전남 해남에서 출생. 200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시집으로 『별빛 체인점』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