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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헌 시인 / 계약직
새벽 첫 버스를 탔다 버스 좌석이 깊게 눌려 있다 지난밤 마지막 승객의 고단했던 하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했거나, 어린 시절 딱지를 주고받듯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처지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새벽 버스에 몸을 실은 내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빌린 둥지에서 몸을 녹이듯 깊은 잠에 빠져든다
버스가 멈췄다 달릴 때마다 잠의 채널이 돌아간다 장그래장그래장그래 지난밤 TV드라마 대사가 이명처럼 울려 퍼진다
벨을 누르고, 환승을 위해 카드를 꺼낸다 하차를 위해 졸린 눈을 여는 사람들
환승을 하듯, 생은 누구에게나 계약직이다 계약직이 아닌 사람이 없다
주영헌,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시인동네, 2016, 90~91쪽
주영헌 시인 / 빨래하기 좋은 날
날이 좋아서
아픔과 슬픔, 아쉬움까지 툭툭 털어 빨랫줄에 널었습니다
채 털어 내지 못한 감정들이 눈물처럼 바닥에 떨어져 어두운 얼룩을 남기지만
괜찮습니다, 금세 마를 테니까요
날이 좋아서 이번에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영헌 시인 / 소면을 삶으며
당신이 소면을 삶으면*
그 옆에 선 나는 멸치로 국물을 내고 애호박을 씻어 잘게 잘라 볶고 계란을 풀어 고명을 만듭니다
소면이 익는 동안
우리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다가 당신에게 고백했던 순간을 얘기하며 난처하게 웃다가
냄비 가득 삶아지는 소면을 보면서 먹지도 않았는데 배부르다던 당신
소면을 담고 따뜻한 육수를 붓고 잘 볶아낸 호박 나물과 노란 고명을 소복하게 올립니다
당신과 함께 먹는 한 생의 국수
* 류시화 시인의 시 「소면」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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