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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선 시인 / 치매의 노래
내 어느날 가출하리 새벽은 숨죽여 소신공양하는 늙은 비구처럼 고요하고 여든 살 치매 앓던 내 아버지같이 마른 통북어같이 아무도 모르게 집 나가리 잠적하리 흉가처럼 먼 옛날부터 오래 비워둔 기억세포에 가서 놀리 때 이른 황사바람을 헌 목도리처럼 두른 개자리꽃이 삭발한 맨머리로 숨어서 떨던 동학사 오르는 초봄의 추운 길이나 말없이 서로 마음 바꾸어 앉은 채 나머지 취기마저 깨기를 기다리던 국립묘지 앞 텅 빈 주차장에서 내 한나절을 놀리 다시 넋 빼놓고 그대 설움과 정신 없이 놀리 아니다, 색깔 몇 벌씩 누렇게 벗은 열한 칸 흑백사진 속 생가에 들러 길로 자란 그리움을 베어서 엮은 망각이 바삭바삭하는 그대의 묵은 편지를 다시 펴서 읽으리 죽음 위에 걸터앉아 애를 낳는 협착한 자궁에서 난산으로 늑장부리는 흐린 희망들을 낳는 산통중인 별들을 산국 끓이는 홀아비처럼 바라보리 그 무렵 그대와 나 목숨의 왕겨더미 속에서 속으로 끊임없이 타드는 뜨거운 겻불이었으니 그 불 속에 묻어둔 식을 대로 식은 운명의 태반 되찾아 태우리 문 닫힌 다시는 영영 문 열고 나오지 못하는 십여 개 중대 시간들이 원천봉쇄한 현재 쪽, 소란스런 정문 밖에는 단벌의 뒷모습만 걸어두리 내 몸만 수척한 등롱처럼 부재중을 밝혀 걸어두리 그리고는 정신은 어느날 가출하여 흉가처럼 텅 빈 그 옛날 기억세포에 가서 놀리
홍신선 詩集(세계사 시인선ㆍ111)『자화상을 위하여』중에서
홍신선 시인 / 자운영 - K에게
해남군 토말부락 마음 끝에 서서 보면 보인다. 다도해 먼 섬들 뒤 은밀하게 조금 더 작은 얼굴 숨기고 있는 그 섬의 후미진 둑길에 오일장날 장꾼들처럼 군데군데 모여서서 흩어져서 핀, 제 기쁨에 넋 놓고 핀 홑생각 자운영꽃들 오전 이른 햇살이 씻겨주는 환한 그 이맛전들.
오늘 이 투명한 날씨는 누구에게 드리는 사랑인가 누구에게 목매단 그리움인가.
『자화상을 위하여』중에서
홍신선 시인 / 봄비 개인 뒤
비 기운이 지방도의 산 옆구리께 반은 개었다 허리 굵은 상수리나무떼 사이로 꼬리 잘리고 허리 끊겨 도마뱀처럼 기어가는 햇볕 두어 오라기. 쓴 소주 한 모금에 씻긴 내장처럼 랜턴불로 비춰서 들여다본 막창자 속처럼
서산 마애불의 퇴락한 몸 파고 들어가 몇십 가닥 실금들이 문득 기어 들어가다 기어 들어가는 일 깜박 잊고 모두 모여 실뜨기나 뜨며 골똘히 놀고 있는
삶의 하릴없이 환한 저 내부.
『자화상을 위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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