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근석 시인 / 사면 death mask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4.

이근석 시인 / 사면 death mask

 

 

당신이 한 문장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한 문장을 이어서 적습니다 문장과 문장 이어지고 그 사이 어디즈음 내가 있을 테지요 그러나 숲, 어디선가 시작되는 숲 숲이란 나무와 나무의 사이일 뿐

 

당신이 쓰고 당신이 덮습니다 천천히 사방 잃어가고 있습니다 돌다 그친 팽이 아직 귓속에 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귀에 그런 팽이 하나씩 돌고 있지요 단 하나의 유년 단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를 영원히 반복하고 당신, 여전히 귀가 붉군요

 

함께 걷다가 대열에서 사라진 누군갈 당신은 찾은 일 있습니다 붉은 귀의 당신이 뒤돌아봅니다 당신이 그를 부르자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어오는 그가 보였지요 당신이 그를 불렀습니다 어서오라고, 너는 너무 늦고 있다고, 당신의 부름과 함께 그가 당신을 향해 고개를 듭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는 당신입니다

 

당신에게선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당신이 이미 오래전 노인이 되었습니다 귀신을 보고 자랐고 끝끝내 귀신 되었지요 잠시와 영원이 헷갈리고 어둠과 당신이, 당신과 어둠이 사실 우리에게 비운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었지요 당신은 내 기억이 납니까

 

여백을 두지 않으려 가져온 말들이 더 여백 같은데 전체가 여백일 때 당신은 어떤 표정입니까 낭패감으로 아침인데 소설이 되지 않는다고 고작인 당신의 길고 서늘한 그 얼굴을 사랑했지요 그리고 나는 당신 기억이 납니다

 

문이 있습니까 물으면 거기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물으며 그 문 열었습니다 열거면서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연 문 안에 생활이 있었습니다 거기엔 있을 것이 있었습니다 없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마술상자 같은 방에 우리가 살았지요

 

물속에서 이는 말은 물속에서 울릴 뿐이라고 당신은 어제 수족관에 가서 물고기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시칠리아산 열대어가 몸의 지느러미를 자꾸만 부르고 이제 당신은 인간의 눈빛을 버리려 합니다 버리려는데 여전히 붉은 두 귀, 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과 당신 자신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 방 생각을 합니다 아직도 당신은 불을 끄고 밥 먹습니까 초면에 실패합니까 여기선 간헐적으로 당신 생각을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라며 슬퍼했지요 가장 먼저 잊었던 사람이라며 당신은 당신을 좋아했지요 당신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또 내가 가면 어디나 여기가 되는 거기서

 

자주 입구입니다 아무 데도 도달하지 못한 채 당신이 도달하려던 흑심입니다 얼굴에서 얼굴입니다 돌아가는 귀신들 말 얻어가는 가운데입니다 거기는 밤입니까, 낮입니까 아아, 입을 벌리면 공허한 입에서 암흑적으로 흘러가는 한낮

 

 진심 어린 사람들의 긴 산책로를 걷다 개를 만났습니다 컹컹, 개 앞에서 태어납니다 그 앞에서야 존재입니다 이렇게 넘치는 생명이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적습니다 그러나 그렇지요, 그래요 당신 소설의 반은 내가 적었지요 잠시

 

 오래된 사진을 쳐다보면 당신은 눈이 부십니까 그것이 당신이 쓰려던 소설입니까 말수가 적던 당신의 말들 기억합니다 당신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제가 들었지요 당신과 걷고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빛 눈을 감으면 내가 옆에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없었지요 우린 진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처럼 진실과 거짓 거짓과 진실에 엉키며 밝히며 멈춰있거나 돌고 있거나 둘 중 하나뿐인

 

빛과 빛을 더할 수 있습니까 빛, 빛, 빛 계속 말하다 보면 입이 빛이 되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습니까 당신 분명한 눈빛이군요 그것이 당신이 빚어낸 빛이로군요 다만 나는 사금파리가 담겨있는 병의 고요, 그 속에서야 겨우 몸이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미안합니다, 미안하지요, 그런 얼굴로 우리가 우리를 부르는 얼굴로 모르는 얼굴로 모르는 척하며 배반하는 얼굴로 숲으로 물들어가는 얼굴 둘

 

계간 『애지』 2021년 여름호 발표

 

 


 

이근석 시인

1994년 충남 논산 벌곡에서 출생. 2021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