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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시인 / 무화과나무의 꽃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신다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만큼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 1990년
박라연 시인 / 지리산 고로쇠나무
1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꽂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철 내내 속이 쓰리던 나무들 전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2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박라연 시인 / 모(母)
어미의 이름을 얻으려는 시험지 앞에
무수한 꽃숭어리를 피워냈으나 열매는 고작 몇 개뿐인 모과나무가 왔다
알몸으로 겨울을 나는 그 모과나무 곁에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야 값이 쳐진다는 밍크 한 마리가 왔다
그렇게 저를 다 내주고도 살아남은 알몸의 밍크 한 마리가 그려진 답안지가 왔다
- <계간문예> 2009년 여름호
박라연 시인 / 목계리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겨우 몇 평의 감자밭 옥수수 밭이 보이면 그 둘레의 산들이 먼저 우쭐거린다 제 몸을 가득 채운 것들을 신의 흔적이다, 라고 믿지만 두 눈으로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람의 흔적인 옥수수의 흔들림 감자꽃 향기는 왕산(王山)이 본 것 중 가장 귀한 것이다 가도 가도 산 뿐이다가 차 파는 오두막집이 보인다 그 주인은 이미 산(山)의 일부이면서 바람의 일부일 것t이다 적막 속 어딘가에 집 한 채만 보여도 왕산(王山)은 그 기(氣)를 바꾼다 수십 만평의 산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것은 한 됫박 될까 말까 한 몇 사람 의 숨소리일 것이다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 2006년 렌덤하우스중앙
박라연 시인 / 달에 내리는 두레박처럼
아무도 모르게 바닷물이 하늘에 오르는 사이
꼭 그 사이만큼만 강화 바다는 하늘을 벗어버린 달의 표면
낮게 내려앉은 저 달의 모래 구릉과 작은 골짜기와 게가 뚫은 소통과 소통 사이를 크고 작은 무덤 사이를
여름 내내 들끓던 사람의 열망 흐르고 흘러 달에 내리는 두레박처럼 닿아보리라
닿자마자 수백 볼트의 사람수련이 쑥쑥 솟아오르리라 돌로 쳐죽인 허망이 다 빠져나와 수련 천지로 붉게 물들일 무렵
한 떼의 갈매기들 몰려와 끼룩끼룩 울어대리라 갈매기 울음에 갇힐까 두려워
궁둥이를 뺀 두레박엔 반은 달 또 반은 바다가 출렁거렸으리라
―《시인시각》200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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