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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산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나희덕 시인 / 어린 것
어디서 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 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 떼
나희덕 시인 / 겨울 아침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개가 한 획 그으면 모화(模畵)하듯 날아오르는 작은 날개들,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나희덕 시인 /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위기와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마비에 대해 파도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거미처럼 분비액을 뽑아내는 저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소음의 벽을 향해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나희덕 시인 / 난파된 교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교실에서처럼 선실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그 말에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앉아 있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조립을 기다리는 나사들처럼 부품들처럼 주황색 구명복을 서로 입혀주며 기다렸다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공장의 유니폼이라는 것도 모르고 물로 된 감옥에서 입게 될 수의라는 것도 모르고 아이들은 끝까지 어른들의 말을 기다렸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누군가 이 말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몇 개의 문과 창문만 열어주었더라면 그 교실이 거대한 무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파도에 둥둥 떠다니는 이름표와 가방들, 산산조각 난 교실의 부유물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지만 배를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한낱 무명의 목숨에 불과했다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몇 만 원짜리 승객이나 짐짝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지만 싸늘한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햇빛도 닿지 않는 저 깊은 바닥에 잠겨 있으면서도 끝까지 손을 풀지 않았던 아이들, 구명복의 끈을 잡고 죽음의 공포를 견뎠던 아이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죽음을 배우기 위해 떠난 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탕,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나희덕 시인 / 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줌 손톱 몇 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 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 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 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 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 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 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차로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 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 '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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