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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지영 시인 / 세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4.

박지영 시인 / 세상

 

 

 고추대처럼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릎을 세우고 목을 가누고 말을 하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아가는

 인생이라고 그러지 맙시다

 

 내 딸이 장애인이라서 가족까지 장애인 취급은 어렵지요

 식당 손님으로도 불편했던 적도 많았지요 죄송했었습니다

 

 이제는 소천한 딸을 더듬고 세상의 장애인들을 벗 삼아 조금은 그러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가리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꽃처럼 살아보려 합니다

 

 


 

 

박지영 시인 / 주머니에 남은 것

 

 

그렇게 조용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

다 먹어치운 시간은 소화시키기에 바빠

채 소화되지 않은 것이 문제야

 

사실 내가 사용한 시간과 주머니에 넣어둔 시간

사이에 틈이 생겼기 때문이야

강물의 흐름, 별들의 운행, 자동차 속도계, 스마트폰

그런 것들에게 주머니에 남은 것을 다 주어버렸어

 

입으로는 미래를 삼켜버리고

뒤로는 과거를 내던졌어

더는 필요 없어

 

장미에 가시가 돋을 시간

매미가 허물 벗을 시간이면 충분해

 

과거도 이미 보았고 미래도 다 보았어

내 백골도 보아버렸어

너무 또렷해 무섭지도 않았어

주머니에 남은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

 

 


 

박지영 시인

경북의성 출생. 이화여대 불어교육과 졸업.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수료. 1992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서랍 속의 여자』,『귀갑문 유리컵』,『눈빛』,『검은 맛』, 평론집『욕망의 꼬리는 길다』를 발간. 대구문학상, 금복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