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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복효근 시인 / 만복사저포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4.

복효근 시인 / 만복사저포기

 

 

그것이 사랑이라면

어찌

이승의 것만이 사랑이겠느냐

 

그것이 인연이라면

단 한 번의 저포놀이라 할지라도

숙세(宿世) 내세(來世)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겠느냐

 

옷깃 스친 꽃잎 하나로도

영원이 아니겠느냐

그 단내 나는 숨결

한 바탕 꽃꿈이라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 까지도

사랑하는 나의 길은

이승 저승 영원의 길

 

혹여 네가 다시 그 길에 피어

옷깃에 스칠 수만 있다면

내가 오늘 지리산에 들어

시방세계 꽃잎을 다 헤겠다

 

 


 

 

복효근 시인 / 사다리 사용법

 

 

사다리는 필요할 때 오르는 물건이다

다리라고 밟는 그것이

실은 다리가 아니라 사다리의 어깨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사다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의 발밑에 내어준다

누군가의 어깨를 밟을 때는

그 어깨의 부실 여부를 탓하기 앞서

자신의 체중과 체적에 유의해야 한다

 

열 칸짜리 사다리를 네 칸만 올라가도 될 때가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가서는

내려갈 사다리가 보이지 않기도 하다는데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적절한 위치까지 오르는 것만큼

알맞은 때에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사다리는 내려갈 때 더 필요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전망을 보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없는데

전망에 도취하여 왜 올라왔는지 잊는 경우가 있다

못을 박을지 못을 뽑을지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더 절실한 그 누군가 올라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을 땐

그 즉시 내려오는 것도 중요한 미덕이다

 

올라가 있을 때

누군가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올라갈 곳이 있음에도

사다리가 없을 때보다 더 난감하기 때문이다

(평생 주소를 허공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러 있다)

 

다시 내려올 때는

마음을 저 위에 두고 와서는 안 된다

사다리는 강물 건너는 뗏목과 같아서

다 내려온 뒤엔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내려다보는 데 길들여져서 아무 때고 아무 데서나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려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

저를 받쳐준 사다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앞을 보고 올라갔어도

뒷걸음으로 내려와야 한다

사다리건 사람이건 다리를 붙이고 살아야 할 곳은

또 같은 바닥임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복효근(卜孝根) 시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1991년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등이 있음.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