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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시인 / 만복사저포기
그것이 사랑이라면 어찌 이승의 것만이 사랑이겠느냐
그것이 인연이라면 단 한 번의 저포놀이라 할지라도 숙세(宿世) 내세(來世)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겠느냐
옷깃 스친 꽃잎 하나로도 영원이 아니겠느냐 그 단내 나는 숨결 한 바탕 꽃꿈이라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 까지도 사랑하는 나의 길은 이승 저승 영원의 길
혹여 네가 다시 그 길에 피어 옷깃에 스칠 수만 있다면 내가 오늘 지리산에 들어 시방세계 꽃잎을 다 헤겠다
복효근 시인 / 사다리 사용법
사다리는 필요할 때 오르는 물건이다 다리라고 밟는 그것이 실은 다리가 아니라 사다리의 어깨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사다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의 발밑에 내어준다 누군가의 어깨를 밟을 때는 그 어깨의 부실 여부를 탓하기 앞서 자신의 체중과 체적에 유의해야 한다
열 칸짜리 사다리를 네 칸만 올라가도 될 때가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가서는 내려갈 사다리가 보이지 않기도 하다는데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적절한 위치까지 오르는 것만큼 알맞은 때에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사다리는 내려갈 때 더 필요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전망을 보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없는데 전망에 도취하여 왜 올라왔는지 잊는 경우가 있다 못을 박을지 못을 뽑을지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더 절실한 그 누군가 올라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을 땐 그 즉시 내려오는 것도 중요한 미덕이다
올라가 있을 때 누군가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올라갈 곳이 있음에도 사다리가 없을 때보다 더 난감하기 때문이다 (평생 주소를 허공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러 있다)
다시 내려올 때는 마음을 저 위에 두고 와서는 안 된다 사다리는 강물 건너는 뗏목과 같아서 다 내려온 뒤엔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내려다보는 데 길들여져서 아무 때고 아무 데서나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려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 저를 받쳐준 사다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앞을 보고 올라갔어도 뒷걸음으로 내려와야 한다 사다리건 사람이건 다리를 붙이고 살아야 할 곳은 또 같은 바닥임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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