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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용하 시인 / 생활의 실패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5.

박용하 시인 / 생활의 실패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꿈결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강자한테 덤비고

약자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꿈속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누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꿈의 생활이 여기에 있다

 

이런 생활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는 불변 앞에서 피는 돈다

소박한 생활 앞에서 내 피는 열렬하고

우상은 멀어지고 우애도 빛을 잃고

거창한 꿈 없이 나는 내 발 위에 서 있다

발 위를 가며 평범한 생활을 생활한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은 평범이 그립다고 했을까)

 

사람들 만나 떠들고 술 마시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내가 하는 말이 귀찮아지듯이 그들이 하는 말이 귀찮아진다

내 부모형제가 귀찮아진다

같이 밥 먹는 게 귀찮아진다

그들이 나의 말, 나의 생활을 재미없어 하듯이

나는 그들의 말, 생활이 재미없다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고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언어관과 정치관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 모이는 데 가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영화관까지 가는 게 귀찮고

강연장까지 가는 게 귀찮고

맛집까지 가는 게 귀찮고

비행기 타고 가는 게 귀찮고

예식장 가는 건 아주 귀찮고

상갓집 가는 건 그나마 낫고

괴력난신 같은 건 내다버린 지 옛날이고

음악도 밀쳐 두고 백지 앞에서

노래 부르지 않는 노래를 하면서 지낸다

혼자서 혼자를 즐거워하며 지낸다

 

믿음은 하루아침 같고

우정은 하루저녁 같고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이승을 등에 업고 저승을 배에 안고

아주 딴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 되어 본다

(일상이 그립다고 한 사람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월간 『현대시』 2021년 4월호 발표

 

 


 

박용하 시인

19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見者』,『한 남자』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