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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은숙 시인 / 봄날의 리포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5.

안은숙 시인 / 봄날의 리포트

 

 

-몇 겹 바람의 뭉치

 

몇 겹 바람의 뭉치가 흔들리는 저 분홍의 겹은 바람의 시료(試料)다. 꽃잎을 따라 나오는 분홍은 얇은 혐의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봄의 단추다. 꽃이 핀 나무는 실험용 비커, 흔들면 반응하는 물질이다. 연기도 나지 않는 화재(火災)다.

 

-노란 온도

 

마을 입구 튀밥 기계가 임시 설치되었다. 몇 개의 온도를 지나 노란 온도에서 뒤집힌 울화(鬱火)가 제 가슴을 치듯 흔들린다.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열기가 목질 속에 들어 있다. 섭씨의 타이머를 단 노란 산수유가 핀다. 만약 저 온도가 성화라면, 곧 식은 탄식이 초록의 열매로 자잘할 것이다.

 

-성급한 눈

 

털도 없이 눈뜨는 앙상한 버들가지들, 물소리를 먹고 자란 것들이 가지마다 실눈을 뜬다. 부리에서 받아먹은 기억은 다시 부리가 되고, 이른 봄을 덥히는 저 솜털들은 다시 솜털이 된다. 지금은 모두 입을 벌리고 푸른 잎의 날개를 기다린다. 근처의 꽃잎들은 이소(離巢)를 준비하고 있다.

 

-검은 수심

 

마당을 찾아다니는 화종(花種)이 있다. 검은 수심에 파문도 없이 떨어진다. 흘러가지도 않는 익사체, 나는 마당에서 오래 허우적거린 적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싶어 하던 소리가 있었고 방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던 겹겹의 날씨가 있었다. 나는 방을 떠돌았고 목련은 봄을 떠돌았다. 떠올려보니 흰색의 걸음은 그때 다 디뎌서 지금은 없다.

 

월간 『모던포엠』 2020년 2월호 발표

 

 


 

안은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졸업. 201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2017년《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 당선.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 문학 분야 선정 작가. 제1회 시산맥 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