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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효치 시인 / 바다 어둠 외 1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5.

문효치 시인 / 바다 어둠

 

 

  바닷물에 젖은

  어둠이

  내 살 속에 들어와 있던

  물새 한 마리 지우고 있다.

 

  내 뇌 속에 고여 있던

  종소리 한 떨기

 

  내 피 속에 섞여 있던

  햇빛 한 다발

 

  내 뼈 속에 짓고 있던

  절 한 채 지우고 있다

 

  바닷물에 젖은

  걸쭉한 어둠이

  내 속을 걸어다니며

 

  저기 아득한 시간

  그 바깥의 머나먼 나라로

  나를 밀어내고 있다.

 

 


 

 

문효치 시인 / 시

 

 

  생각지도 못했던

  먼 먼 아지랑이 너머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와 가슴 속에 내려앉고

  이내 하얀 뿌리를 내려

 

  가슴의 진액을 빨아들이며

  잎과 꽃을 피우고

  나를 허무로 앓게 하고

  몸져 눕게 하는

  저것

 

  이름도 형체도

  분명치 않은

  미지수의 문제아.

 

 


 

 

문효치 시인 / 복사나무 밑에서

 

 

  나무는

  꽃과 함께

  기다림을 피워 올리고 있다.

 

  묵은 낙엽 밑에 잠자는

  달빛도 별빛도 깨워 일으키고

 

  밭고랑으로 흐르는

  햇빛도 불러 모아

  나무는

  가늘한 휘파람을 불고 있다.

 

  지하에서 뽑아 올리는 빛깔

  진한 그리움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문효치 시인 / 첫 봄

 

 

   저 상수리나무 가지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우수의 안개가

   이제는 서서히 벗겨지누나.

 

   번민의 뒷 숲

   톡톡 터져 오르는 새 순엔

   동박새 소리 묻어 반짝이누나.

 

   계곡의 둔덕엔

   새벽의 휘파람 소리 접혀 접혀

   얼음장 부수고

 

   흙밭에 뛰어다니는 햇빛

   바위 밑에 모여

   은밀한 사랑 진하게 빚누나.

 

 


 

 

문효치 시인 / 다시 달빛에 대하여

 

 

  영창이 어두워

  달빛을 오려다가

  동그랗게 붙여 보았다.

 

  분명 보름인데도

  달빛의 촉광이

  이제는 낮아졌는가.

 

  두 장 석 장을 붙여도

  밝지 않았다.

 

  아예 달을 따다가

  문짝에 걸어 놓아 보아도

  어둡기만 했다.

 

  바람이 그 흐름을 멈추면

  이미 바람이 아니듯

  내 방에서는

  이미 달이 아니었다.

 

 


 

 

문효치 시인 / 백제시- 구드래 나루

 

 

  나루 건너 저쪽

  흐릿한 산 아래에

  어쩌면 백제 그 시절

  그 사람들 살고 있을 지 몰라

 

  왕흥사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흐릿한 산 아래  

  꿈같은 마을 차려 놓았을지 몰라

 

  구름장 몇 잎

  백제의 깃발처럼 걸려 있고

  저 깃발 아래엔

  서동과 선화같은

  사랑이 있을지도 몰라

 

  먼 먼 산 아래에

  지금도

  먼 먼 옛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몰라

 

 


 

 

문효치 시인 / 님 오시는 아침

- 선화공주

 

 

   저 지평선 끝에

   일어서서 걸어 오시는 이

 

   옷자락, 물들여 나부끼는

   어둠을 털어내고 다가오시는 이

 

   햇빛,

   거대한 악기 속을 지나 나오며

   부신 선율 만들고

 

   선율,

    또한 휘감겨 세상을 밝혀

   그 손목 잡고 오시는 이.

 

   우주의 끝에 씻어 두었던

   맑은 천년

   그 어깨에 날개 달아

   날아 올리며 띄워 올리며

 

   가슴 가슴 속에

   볕드는 방.

   방으로 들어오시는 이.

 

   그 신발 끄는 소리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님 오시는 아침.

 

 


 

 

문효치 시인 / 보길도

 

 

   누워 있던 추억 한 채

   일어서서 울먹이더라.

 

   울먹이면서

   남해 푸른 물 끌어다가 덮어쌓더라.

 

   난잎이나 고사리 작은 키에까지도

   얽혀 있는 고산의 노래

   꽃가루나 홀씨가 피어

   피우피우 날아 오르더라.

 

   바람은 세월의 무게에 눌려

   허연 슬픔이 되고

   이윽고 물에 내려 첨벙대더라.

 

   동백꽃 터지게 터지게

   붉어가더라.

 

 


 

 

문효치 시인 / 정암사 아리랑

 

 

   범종 소리에

   산이 몸을 헐어 섞는다.

 

   황조롱이 부리로 건져온

   아우라지 물에 빠진 소리도

 

   산 목련 꽃잎에서

   막 내려오는 햇빛의 넋도

   몸을 풀어 섞는다.

 

   합장으로 탑돌이하던 여인

   저 초록 저고리 속

   아리아리 쓰리쓰리

   해묵은 아픔이

   수마노 탑에 섞인다.

 

   키가 쑤욱 자라는 탑

   아리이랑 아리이랑

   그렇게 한 번 넘어간다.

 

 


 

 

문효치 시인 / 삼척

 

 

   강물 속엔 나비가 헤엄치고

   달빛에서는 은빛물고기 날아다니고

 

   햇빛은 언제나

   풍금소리를 내며 하늘로 굴러가고

 

   별빛은 또

   밝은 등을 구부려 동굴 속으로 모여들고

 

   저 자색의 산 너머엔

   상상의 소설책 중간쯤

   참으로 신기한 나라 있을 것 같아

 

   처참하게 깨뜨려진 유년의 시대

   그 새까맣게 그을린 파편을 모아

   말끔한 항아리로 다시 조립하는

 

   퍼내도 퍼내도

   맑은 꿈이 고여 있는 항아리같은

   저 높은 산 그 너머.

 

 


 

 

문효치 시인 / 봉선사에서

 

 

   저녁 나절

   얕은 안개처럼

   봉선사에 스며들다가

   종각 토방에 걸려서 넘어진 김에

   반가사유상의 흉내로 앉아 있으니

   청설모 한 마리

   달빛 한 조각 물고 지나가다가

   놀란 눈으로

   물고 가던 달 한 조각

   내 시선 위에 넌지시 걸어놓고 가더라

 

 


 

 

문효치 시인 / 망해사- 바람

 

 

   강이 바다에 이르러

   그 품에 누워 섞일 때

   마당 가득 달빛 풀어

   뭉개어 놓고

 

   그대는 다시

   어디로 가시는가

   달빛 속에서

   알몸의 내 몸은

   온통 열꽃으로 붉은데

 

   그대는

   신열로 출렁이는 내 살의 목마름을

   놓아두고 가시는가.

 

 


 

 

문효치 시인 / 망해사-聽潮軒

 

 

   염불이 끝나고

   스님 두어 분

   방금 바다에서 건져온

   파도 소리 하나

   반질거리는 방바닥에 굴리며

   귀 기울이고 있네.

   어느새 들어온

   달빛, 물감 풀어 바르며

   함께 듣고 있네.

   키 작은 맨드라미

   발돋움으로 문틈에 매달리고

   큰 바다의 파도 소리들

   청조헌 방안으로

   목을 늘여 넘겨다 보네.

 

 


 

 

문효치 시인 / 한강 단상 · 4

 

 

   달은 소나무 팔뚝을 붙들고

   디퉁거리며 매달려 있어요.

 

   강기슭 산동네에서 낳아

   두어 마지기 밭만 뒤적거리며 사는

   산동네 아줌씨.

 

   시아버지가 감나무 그늘 밑에 퍼 두고 가신

   맑은 강물 한 항아리

   간직하고 살아요.

 

   이제는 앞강이 오염되어

   강에는 내려 서지도 못하는 달이

   가끔, 이 아줌씨의 항아리 물에

   몸을 적시고 가요.

 

 


 

문효치 시인

1943년 전북 군산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시집 『무령왕의 나무새』『왕인의 수염』『별박이자나방』『모데미풀』『나도바람꽃』등 13권, 천상병시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익재문학상, 한국시협상 등 수상, 옥관문화훈장 수훈,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장, 주성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계간 『미네르바』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