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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온리 시인 /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5.

김온리 시인 /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내라는 말이 참 좋았다

며칠 전부터 헐어있던 입안을 달래 줄

흰죽 한 사발이 그리웠던 참인데

아내라고 중얼거려 보면

뜨끈해진 입안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의 아내인 나는

누군가의 뒤꼍인 사람

그러므로 비가 내리는 메가박스 뒷골목에서

꽃무늬 우산을 쓴 아내를 기다려 보았다

아내를 불러보는 동안

누군가가 기다리는 사람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반쯤 젖은 채 어깨를 부딪쳐 갔다

눈을 감으면

나를 기다리는 무수한 아내

없으면서도 있는, 이마를 짚어주는 아내

누군가의 뒤꼍이 될지언정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녹색으로 바뀐 건널목을 급히 뛰어가는

아내를 붙잡지 않았다

 

 


 

 

김온리 시인 / 나비야, 부르면

 

 

눈물이 없는 표정처럼

오른손을 내민다

 

나비야, 부르면

눈을 깜빡이는 검은 고양이의 미소로

 

너는 알고 있을까

울음이 번져오는 첫 페이지를

 

책갈피에는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한때 내 것이었던 온기

 

입술을 포갠 채로

넘겨지는 책장冊張을 바라보았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눈동자에 대해

오래도록 바짝 치켜드는 것에 대해

 

오른손으로 그리다가 왼손으로 지우는

뜨거웠던 한 호흡처럼

 

손금이 다시 꿈틀거린다

빈손처럼 무겁게

 

최초의 손처럼

 

 


 

 

김온리 시인 / 수요일의 우산

 

 

수요일의 주머니를 뒤집으면

사선으로 쏟아지는 먹구름이 있다

 

화요일에 태어나서 목요일에 죽는

박쥐처럼

 

젖은 창을 열어젖히고

맹렬하게 날아가는 비행을 꿈꿔보지만

먹구름의 혀끝에는 가시가 있어

 

가시 돋친 수요일은 갈라진

입술에 머무른다

 

아무리 퍼덕거려도 날지 못하는

새가 우산이라면

부러진 죽지 하나가 내 몸을 흘러다닐 때

나는 어떤 목소리를 가질 수 있을까

 

때론 나도 노래하고 싶어서

비에 젖은 날개를 차례로 펴본다

 

펼쳐진 세상은 아름다운가요

들릴 듯 말 듯 나는 울지만 상처 난 울음은

깊은 리듬으로 변주될 뿐

 

빗물 뚝, 뚝, 떨어지는

수요일의 우산 속에 새는 없고

수요일만 있다

 

 


 

김온리 시인

부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졸업. 2016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비야, 부르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