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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미야 시인 / 그래서 늦는 것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6.

류미야 시인 / 그래서 늦는 것들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류미야 시인 / 맹목

 

 

세상 가장 앞뒤 없이 아름다운 말 있다면

눈앞 캄캄해지는 바로 이 말 아닐까

해와 달 눈부심 앞에 그만 눈이 멀 듯이

 

큰 기쁨 깊은 사랑 크나큰 마음으로

아무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눈멀어, 아주 한 마디로 끝내주는 이 말

 

 


 

 

류미야 시인 / 데스마스크

 

 

입술을 가렸는데 어제가 사라졌다

 

모르게 새 나오는 비명을 틀어막듯 소리를 누르느라 창백해진 흰 손바닥, 한 벌의 마스크는 미리 입어본 수의다 죄 없는 침묵으로 들끓는 지난날들을 제 손으로 염할 동안 육탈한 말의 뼈는 고요 속으로 든다 생의 맨몸 민낯을 처음으로 만지며 거울 속의 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

 

죽음을 살아보면서 비로소 살아 있는

 

 


 

 

류미야 시인 / 레트로액티브(Retroactive)

 

 

비극의 입구에선 차가 늘 고장 난다

파국을 막으려고 뛰어들어 보지만

현재는 과거의 오작동, 현실은 낮의 악몽

 

우리에게 그런 날 다시 올는지 몰라

 

지겨워, 꽃빛 지겨워,

 

초록을 낭비하며

 

물 쓰듯 뻐꾸기 울음 흘려보낼

 

그 봄날

 

 


 

류미야 시인

2015년 월간 《유심》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눈먼 말의 해변』과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가 있음. 공간시낭독회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