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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진호 시인 / 녹슨 못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6.

박진호 시인 / 녹슨 못

 

 

녹슨 못 하나 하나 펴서 박는 목공의 손놀림

새 못보다 녹슨 못이 좋다는 듯

모아 놓은 공구함의 녹슨 못들

세월의 흐름 속에 생기는 녹

물 먹은 존재로서의 녹

나무와 나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힘이 녹인가

 

녹슨 못 하나 찍어 논 흑백 사진

삶의 여정을 잘 소화한 인간의 모습이다

성한 곳 없이 부식된 못 하나에서 느끼는 카리스마

 

신의 은총이 내린 인간의 성숙함

녹슨 못

 

 


 

 

박진호 시인 / 기연(奇緣)

 

 

꽃술에 나비 찾듯

해안가 바위의 아늑함은

용궁에서 올라온 연꽃일까

 

올해도 8월의 매미 소리에 따라

떠나는 피서

새로운 인연 위해

 

미지의 세계

마도로스의 바람처럼

여름의 신기루 찾는다

 

 


 

 

박진호 시인 / 음악

 

 

바람의 끝에는 붓이 있어 그림의 향이 울린다 비워내지 못하는 속물의 역한 향을 씻어 주듯이 차분한 한 마디 흐름마다 재스민 향이 배어 있다 재스민 향이 그려가는 자국에 흥겨움이 있다 흥겨움의 어깨춤 뒤에 오는 완성된 그림자는 영혼 안에 명품으로 가득 찬 충만감으로 보인다 어제오늘의 그 모든 순간 속 만들어가야 할 것 잊어버린 추억의 안타까움마저 한 선율이 되어 마음속을 채워주는 뿌듯한 안정감으로 이 순간 해야 할 내일의 희망이 들려온다 바람의 오현 위의 콩나물들을 튕겨 보다 보면 채움과 비움의 울림으로 영혼은 배부르다 소중한 순간의 간절함을 이해하는 듯이

 

 


 

 

박진호 시인 / 무엇일까 3

 

 

늘 열심히 살아도 모르는 모습의 나

아는 진리는 경계선 모르는 오답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먹이 사슬 속

머리를 따르던 결과 후회만 느낄 뿐

마음으로 물러설 수 없는 링 안에서

비켜서서 허공만 물어뜯습니다

나 아닌 우린 서로의 피해자라고

우기고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갈 구멍 없는 질그릇 안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진실도 거짓의 파편

내가 나에게서 도망하기를 시도했습니다

그 불신의 탈출구가 명상 또는 기도라 하네요

그 기도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이불 속에 머리 박고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데

지나가던 개가 듣고 짖으니 해명할 필요가 없더군요

왜 나를 축복할 시간이 없나요

왜 언제나 선 밖으로 밀려나나요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놀고 있지요

 

 


 

 

박진호 시인 / 무엇일까 5

 

 

욕조에 몸을 담그고 지난 삶 떠올리면

가위에 눌려 허덕여 온 그늘이 많았다

수영장에 가면 왜 그리 뜨기 어려운지

물 먹지 않으려 허덕이던 시간들

삶이 어려울수록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간절할수록 찾게 되는 신

삶의 그늘이 선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은총

‘선과 악’ 답하는 자 삶의 문이 열린다

개인이 아닌 모두의 문제를 풀어주는 문제

어둠의 그늘에 들어간 자만이 풀 수 있는 기도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건 심판이 있기 때문

어두운 미래에도 희망이 있는 건

하늘 위 햇살과도 같다

 

 


 

 

박진호 시인 / 찰나의 미

 

 

날아오르는 비둘기의 날개 춤 위에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온 햇살 웃음

 

꽃무리 속 섞여 있는 나비의 꿈

파도의 물보라 벽을 타고 가는 서핑의 멋

 

처마 끝 낙숫물이 항아리 안의 벽을 울리는 소리

심금의 줄을 연주하는 빗방울의 한 획

 

오고 가는 마음의 한 술 건배

어숭그러한 뚝배기 한 사발

 

 


 

 

박진호 시인 / 깨달음覺

 

 

혼돈에서 깨어나는

구도의 초점을 잡는

 

언제나 그대로인

일생의 초점

 

영혼에 투사된 그림

완성되는 그림엽서

 

심판 뒤의 초대장

선명한 엽서

 

 


 

 

박진호 시인 / 세월

 

 

지나가는 시간에도

지문처럼 의미가 묻어 있다

 

기계처럼 사는 것도

소용돌이치는 시각의 좌표 위에

 

부표처럼 떠 있기에 느끼는 공허함이다

 

순간의 맛을 보려 해도

호수 위 빗방울처럼

무심한 세상 앞에 퍼지는

허상의 동심원이다

 

 


 

 

박진호 시인 / 비

 

 

슬픔을 품고 먹구름을 몰고 오는 바람결

 

빗방울 하나하나 맺히는 아픔 느끼며

 

나뭇가지의 잎도 힘껏 흐른다

하늘을 우러러 이겨내야 할 숙명처럼

빗 뭉치의 타격은 내 안의 잠재된 응어리를 푼다

 

이 생의 전생에 씻어 낼 수 없을 만큼 아픈

상처들을 잎사귀는 빗방울에 내어 놓는다

하늘과 땅이 화해할 수 없는

비밀을 오늘 비로소 타협하려나 보다

빗방울을 흘러 보내며 내 비밀 또한 흐른다

수천 년의 한이 흐른다

수억 년의 한이 흐른다

내 속의 아픔이 시원해한다

 

 


 

박진호 시인(사진작가)

2011년 계간 문파문학 20호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문파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성남 지부, 동국문학회, 한국가톨릭문인회,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이며, 또한 한국가톨릭문인회 간사다. 시집: <함께하는>, <똑바로 가기 위해 왔다 갔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