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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시인 / 펠리컨
늙은 새가 주둥이를 벌리자 몸집 큰 새끼들이 달려와 먹이를 쪼아 댄다 한 녀석은 꼬리깃털을 세차게 휘저으며 부리를 목구멍까지 집어넣는다 어미가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는 일 탄성 잃은 입주름을 끌어당겨 주둥이를 크게 벌려도 꺼내줄 수 있는 건 토사물뿐, 새끼들의 부리가 한 방향으로 길어지는 날들이다 어미의 입만 바라보는 새끼들의 몸집은 갈수록 비대해져가고 상처 많은 주둥이는 오래 다물어지지 않는다 삼킨 먹이를 역류해내는 멸종 위기의 서식풍경, 어미는 삶의 가장 쓰린 식도염을 앓는 중이다
<제2회 천강문학상 대상수상작>
박은영 시인 / 토구(土狗)*
나는 삽 한 자루를 가지고 부화했다
땅을 팔 때마다 부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배냇짓을 잊어버리고 땅파기에 열중한다 밤늦도록 땅을 파며 놀던 나의 멱살을 쥔 아버지처럼 손아귀 힘이 강해진다 파도 파도 배고픈 날들 밥그릇 수만큼 삽은 커다래지고 손톱은 딱딱해져 삽날에 찍혀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 비이이- 구덩이로 고여 드는 울음, 물기 많은 한숨이 원을 그리며 퍼진다 한 삽 한 삽 퍼 올린 흙더미에 아내가 딸려오고 부화한 새끼들이 배고픈 줄도 모른 채 흙가루를 날리며 웃어댄다 움켜쥐는 법을 터득한 후 빨라진 삽질의 속도, 밥그릇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드러낸다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 수평선 안쪽으로 각혈처럼 노을이 번진다 세상이 한 삽 가득 어둠을 떠먹는 시간 갈기를 세운 사자자리별똥별에 어깨는 움츠려들고 삽자루를 쥔 흙투성이 손은 굳어 펴지질 않는다 이제 삽을 내려놓아야 할 때 한평생 파놓은 깊고 어두운 구덩이 겨우, 내 한 몸 뉠 자리다
*땅강아지 혹은 땅개, 땅개비라고 불리는 곤충.
박은영 시인 / 구멍을 감추고
상주 근무를 했다 발꿈치가 서늘하게 그리운 날이 있다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둥글게 살았다 거울을 보며 하품 참는 연습을 하고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백한 가지 대화법을 읽거나 정수리가 뜨거워지면 숫자 열을 세었다 저녁은 도넛,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매달 십오 일이면 새어 나가는 게 많았다 허리둘레가 늘었고 돌려 막기를 했다 양말을 꿰매다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날은 작은 바늘을 물려받은 것을 원망했다 내가 가진 바늘로는 기름에 찌든 끼니를 먹고 손가락을 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구멍의 시작, 돌반지를 팔고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쏘아 올렸다 마이너스 통장엔 동그라미가 하나 더 생기고 자동 이체로 빠져나가는 보름 저 밤하늘도 구멍 난 양말을 신었다 발꿈치가 환하다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은영 시인 / 발코니의 시간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2018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은영 시인 / 인디고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 인디고 : 청색염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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