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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영석 시인 / 침묵에게 배우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7.

임영석 시인 / 침묵에게 배우다

 

 

 세상 일 다 몰라도

 침묵 하나 배운다면

 

 어둠 속 별빛처럼

 천 년 만년 살 것인데

 

 내 귀는

 침묵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입이 있어 말을 하고

 귀가 있어 듣는 건데

 

 나무는 그 침묵을

 어떻게 알아듣고

 

 세월의

 답을 말하듯

 침묵의 글을 새긴다,

 

 


 

 

임영석 시인 / 고추

 

 

늦가을 고추는 뿌리를 뽑아야

서리가 와도 얼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고추는

늦가을 된서리 한 번 맞으면

땡땡한 열매가 모두 삭아 내린다

그래서 고추밭 농부는 서리가 올 때쯤

뿌리를 낫으로 자르거나 뽑아 둔다

악착같이 번성하겠다는 미련을 끊어 놓아야

발정을 멈추고 매달고 있는 고추를

뜨겁게 지켜내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고추가

제 몸에 불을 질러 다 타들어 갈 때까지

열매를 지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농부는 고추의 뿌리를 뽑아

허공에 걸어둔다

 

 


 

 

임영석 시인 / 에어컨도 바람피운다

 

 

  시인 박성구 씨는 「선풍기의 예의」에서 선풍기가 바람난 놈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 선풍기보다 몇 단계는 더 고단수의 바람을 피우는 놈이 있다. 밖의 날씨가 더우면 더울수록 옷 하나 걸치고 싶지 않기 때문애 놈의 바람은 19금이 봉인 해제되었다. 심지여 바람 잘 피우도록 사용설명서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놈에게 더운 날씨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워낙 요망한 놈이 되다 보니 바람도 그냥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예약도 되고, 마무리 깔끔하게 돌아서는 법까지 알고 있다. 문이란 문을 다 처닫고 바람을 피우는 것은 필수다. 그러지 않으면 요금을 왕창 물어야 한다. 밖의 날씨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는 더 센바람을 피워야 한다. 때문에 놈의 사용설명서에는 어린이가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 시키고 있지만, 노약자나 어린이 때문에 놈은 오래오래 바람을 피워 놀아줘야 한다. 놈에게는 바람을 피우라는 정도가 아니라 바람을 피우도록 엉덩이를 들쑤셔 주어야 한다. 가끔씩 휴식은 필수적이다. 놈은 바람만 피우다 늙어가지만 화대는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임영석 시인 /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나, 이제부터 반듯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좀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그간 허리 휘게 일하고 돈 벌어 꼬박꼬박 세금내며 살았는데

  백수건달 양아치처럼 살아가기로 했다

  내가 반듯하게 살아간다고 세상이 반듯한 것도 아니다

  벚꽃 피면 벚꽃 축제, 진달래 피면 진달래 축제,

  갈대꽃 피면 갈대 축제, 해바라기 피면 해바라기 축제

  눈이 오면 눈꽃 축제, 이 나라 축제란 축제 모두 즐기며 살기로 했다

  이미 지구는 23.5도 기울어 있다

  기울어 있는 지구를 똑바로 세우고 살지 못할 바에야

  내 몸을 기울여 살기로 했다

  그래야 내 정신이 똑바로 서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은

  지구가 기울어 있는 만큼

  내 몸을 기울여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 몸을 23.5도 기울여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시집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2020, 시산맥사

 

 


 

임영석 시인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현대시조>로 등단, 시집『이중 창문을 굳게 닫고』『사랑엽서』『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 놓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배경』『고래 발자국』 시조집 <꽃불> 외 2권,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들>을 출간, 2012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2017년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2011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