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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자 시인 / 저 소나무
만산홍엽 무리 속 꽹과리 치고 상모 돌리며 한마당 신나게 잔치 벌이고 있는 산속 여벌 옷 갖지 못한 한 벌 뿐인 푸른 옷의 저 소나무 왕따 당한 듯 참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리트머스 종이처럼 조석으로 안색 바꾸는 세상 단정하고 꼿꼿한 그 모습 세상 사람들은 으뜸으로 손꼽지만 때론 젖은 옷 같은 무거운 허울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함께 어울리고 싶을 때 있으리라 활활 붉게 온몸 불태우며 비탈진 겨울 산 눈사태지 듯 무너지고 싶을 때 있으리라
신구자 시인 / 보시
매미소리 왁자한 중복날 불볕 더위에 허리 휘며 일하는 개미들 노역이 안스러웠든지 제 몸 던져 복달임 시켜주고 있던 지렁이 한 마리
신구자 시인 / 이 가을 첫 손님
하늘빛이 청다래처럼 곱던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내 등 뒤 모자 속, 언제 숨어들었던가 살며시 따라온 사알짝 얼굴 붉힌 낙엽 두 장
신구자 시인 / 그런 날 있어
그저 그쪽 하늘 건너다 볼 뿐이었는데 그 하늘 너무 깊고 푸르러 그렁그렁 눈물 매달리게 하는 그런 날 있어
겨우네 창밖 서성이며 안달하던 햇살 우수 지나자 소리 없이 거실까지 나른하게 스며들어 빤히 날 들여다 보며 아직도 가부좌 틀고 앉은 저린 마음 하나 풀지 못했냐며 막막한 그리움의 맨살 콕콕 쪼아대며 속수무책의 적막 우수수 부려놓고 서걱서걱 명치끝 베어먹는 그런 날 있어
그런 날 있어
신구자 시인 / 꽃 피는 봄이라 가슴 더 저릴까
해질녘 전등사 가는 길 멀리 뻐꾸기 울음소리 목탁 치듯 은은히 울리는데 전등사 추녀 끝 엉그주춤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저 여인,
꽃피는 봄이라 가슴 더 저릴까 차라리 엄동설한 꽁꽁 달구어진 욕망 잠재울 수 있을까 댕그랑 댕그랑 추녀 끝 풍경소리 애닮다
새침하니 눈 내려뜬 매화 한 송이 툭, 목가지 꺾어며 저녁 예불 징소리 울리고 있다
신구자 시인 / 쉬, 소리
초록이 지쳐 붉게 굽이굽이 출렁이며 물들고 있던 날 팔공산 돌구멍절 뒤간에 앉아 쉬를 했다
이승과 저승과의 거리만큼 아득하고 아득하여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그 소리 들린다는 돌구멍절 뒷간 그 명상의 소리, 그것도 우주만물이 깨어나는 신새벽에 천둥소리로 내리치면 좋겠다
신구자 시인 / 땡볕 속 찾아갔더니
부처님 향기 은은하게 피워 한 세상 환히 밝혀주고 있다는 상주 세남골 백련의 바다 땡볕 속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연꽃은 소롯이 왔던 길 되돌아 가고 연밥들만 고개 주억거리며 뜨거운 햇살 갈무리 하는데 끝자락 부여잡은 한발 느린 연꽃, 푸른 잎 속에서 수줍은 듯 섭섭지 않게 날 반겨주었네 그 곁 해바라기들 오가는 사람들 맞아주며 활짝 한낮을 공양드리고 있었네
신구자 시인 /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
휘영청 보름달 같은 종조할아버지 청주댁 소실 데리고 압록강 수풍댐 공사장 십장으로 철새처럼 떠나버린 뒤 낙과된 두 남매 데리고 한평생 삯바느질로 개미허리 삶 꾸려온 종조할머니, 그 남매 알밤같이 키워 출가 시킨 뒤 홀로 남아 앞뒤 돌담 위로 꽃 진 자리 또 꽃 붉게붉게 피워 올렸던 능소화
세상사 돌고 돌아 쩍쩍 주머니 낡아 모래바람 일자 버림받은 종조할아버지 허옇게 머리칼 서리발 내려 굽이굽이 고개 떨군 채 되돌아 온 조강지처 품속, 외로움과 서러움의 불면들 기다림으로 쌓아올렸던 종조할머니 한 생애 굳어가던 돌담 속 연민으로 용서로 구둘장처럼 품어주던 종조할머니 그 능소화 지금도 따뜻이 피고 있을까
신구자 시인 / 우리 아버지
중앙청 농림부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친구 때문에 6.25사변 때 죄없이 당하고 정부 환도 후 모시러 왔을 때 남과 북 사이에서 공깃돌처럼 당한 고통 멀미 내며 칩거한 채 쪽 고른 이빨처럼 세 살 터울 우리 육남매 못 밑 옥답 바꾸어 공부시켰다
길을 가다가도 사내아이 만나면 그놈 잘 생겼다 함지박 웃음 웃으면서 당신 손녀들은 땡감 대하듯 하던 큰집 할아버지 논밭 팔아가며 딸아이 공부 시킨다 못마땅해 하면 마른 저수지 물 채워 놓듯 머릿속 지식은 평생을 윤택하게 해준다고 하던 아버지 고문 후유증으로 지천명에 여생 접어셨다
못둑에 앉아 하염없이 세월 낚으며 비탈진 들녘에 핀 들국화를 사랑하셨던 지금도 그 논밭 저만큼 바라다 보이는 고향 뒷산에 어머님과 함께 들국화로 피어 계시는
신구자 시인 / 그런 시절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늘 그러셨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걸 쫑알대면 “나 먹을 것 다 먹고 어떻게 남들과 나눠 먹느냐”고 잘 곳 없는 방물장수도 재워주고 거지가 와도 비록 된장과 김치 한 가지라도 소반에 수저 가지런히 놓아 툇마루로 갖다 주었다
그땐 모든 게 궁핍했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마음 길에 도란도란 개울물 흐르듯 따뜻한 온기가 흘러갔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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