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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구자 시인 / 저 소나무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2.

신구자 시인 / 저 소나무

 

 

만산홍엽 무리 속

꽹과리 치고 상모 돌리며

한마당 신나게 잔치 벌이고 있는 산속

여벌 옷 갖지 못한 한 벌 뿐인

푸른 옷의 저 소나무

왕따 당한 듯 참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리트머스 종이처럼 조석으로 안색 바꾸는 세상

단정하고 꼿꼿한 그 모습

세상 사람들은 으뜸으로 손꼽지만

때론 젖은 옷 같은 무거운 허울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함께 어울리고 싶을 때 있으리라

활활 붉게 온몸 불태우며

비탈진 겨울 산 눈사태지 듯

무너지고 싶을 때 있으리라

 

 


 

 

신구자 시인 / 보시

 

 

매미소리 왁자한 중복날

불볕 더위에 허리 휘며 일하는

개미들 노역이 안스러웠든지

제 몸 던져

복달임 시켜주고 있던

지렁이 한 마리

 

 


 

 

신구자 시인 / 이 가을 첫 손님

 

 

하늘빛이 청다래처럼 곱던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내 등 뒤 모자 속,

언제 숨어들었던가 살며시 따라온

사알짝 얼굴 붉힌 낙엽 두 장

 

 


 

 

신구자 시인 / 그런 날 있어

 

 

그저

그쪽 하늘 건너다 볼 뿐이었는데

그 하늘 너무 깊고 푸르러

그렁그렁 눈물 매달리게 하는

그런 날 있어

 

겨우네 창밖 서성이며 안달하던 햇살

우수 지나자 소리 없이 거실까지

나른하게 스며들어 빤히 날 들여다 보며

아직도 가부좌 틀고 앉은 저린

마음 하나 풀지 못했냐며

막막한 그리움의 맨살 콕콕 쪼아대며

속수무책의 적막 우수수 부려놓고

서걱서걱 명치끝 베어먹는

그런 날 있어

 

그런 날 있어

 

 


 

 

신구자 시인 / 꽃 피는 봄이라 가슴 더 저릴까

 

 

해질녘

전등사 가는 길

멀리 뻐꾸기 울음소리

목탁 치듯 은은히 울리는데

전등사 추녀 끝 엉그주춤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저 여인,

 

꽃피는 봄이라 가슴 더 저릴까

차라리 엄동설한

꽁꽁 달구어진 욕망

잠재울 수 있을까

댕그랑 댕그랑

추녀 끝 풍경소리 애닮다

 

새침하니 눈 내려뜬 매화 한 송이

툭, 목가지 꺾어며

저녁 예불 징소리 울리고 있다

 

 


 

 

신구자 시인 / 쉬, 소리

 

 

초록이 지쳐 붉게 굽이굽이 출렁이며

물들고 있던 날

팔공산 돌구멍절 뒤간에 앉아

쉬를 했다

 

이승과 저승과의 거리만큼 아득하고 아득하여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그 소리

들린다는 돌구멍절 뒷간

그 명상의 소리,

그것도 우주만물이 깨어나는 신새벽에

천둥소리로 내리치면 좋겠다

 

 


 

 

신구자 시인 / 땡볕 속 찾아갔더니

 

 

부처님 향기 은은하게 피워

한 세상 환히 밝혀주고 있다는

상주 세남골 백련의 바다

땡볕 속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연꽃은 소롯이 왔던 길 되돌아 가고

연밥들만 고개 주억거리며

뜨거운 햇살 갈무리 하는데

끝자락 부여잡은 한발 느린 연꽃,

푸른 잎 속에서 수줍은 듯

섭섭지 않게 날 반겨주었네

그 곁 해바라기들

오가는 사람들 맞아주며 활짝

한낮을 공양드리고 있었네

 

 


 

 

신구자 시인 /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

 

 

휘영청 보름달 같은 종조할아버지

청주댁 소실 데리고 압록강 수풍댐 공사장 십장으로

철새처럼 떠나버린 뒤

낙과된 두 남매 데리고 한평생 삯바느질로

개미허리 삶 꾸려온 종조할머니,

그 남매 알밤같이 키워 출가 시킨 뒤 홀로 남아

앞뒤 돌담 위로 꽃 진 자리 또 꽃

붉게붉게 피워 올렸던 능소화

 

세상사 돌고 돌아 쩍쩍 주머니 낡아 모래바람 일자

버림받은 종조할아버지

허옇게 머리칼 서리발 내려 굽이굽이 고개 떨군 채

되돌아 온 조강지처 품속,

외로움과 서러움의 불면들 기다림으로 쌓아올렸던

종조할머니 한 생애 굳어가던 돌담 속

연민으로 용서로 구둘장처럼 품어주던

종조할머니 그 능소화

지금도 따뜻이 피고 있을까  

 

 


 

 

신구자 시인 / 우리 아버지

 

 

중앙청 농림부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친구 때문에

6.25사변 때 죄없이 당하고

정부 환도 후 모시러 왔을 때

남과 북 사이에서 공깃돌처럼 당한 고통

멀미 내며 칩거한 채

쪽 고른 이빨처럼 세 살 터울 우리 육남매

못 밑 옥답 바꾸어 공부시켰다

 

길을 가다가도 사내아이 만나면

그놈 잘 생겼다 함지박 웃음 웃으면서

당신 손녀들은 땡감 대하듯 하던 큰집 할아버지

논밭 팔아가며 딸아이 공부 시킨다 못마땅해 하면

마른 저수지 물 채워 놓듯

머릿속 지식은 평생을 윤택하게 해준다고 하던 아버지

고문 후유증으로 지천명에 여생 접어셨다

 

못둑에 앉아 하염없이 세월 낚으며

비탈진 들녘에 핀 들국화를 사랑하셨던

지금도 그 논밭 저만큼 바라다 보이는

고향 뒷산에 어머님과 함께

들국화로 피어 계시는

 

 


 

 

신구자 시인 / 그런 시절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늘 그러셨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걸 쫑알대면

“나 먹을 것 다 먹고 어떻게 남들과 나눠 먹느냐”고

잘 곳 없는 방물장수도 재워주고

거지가 와도 비록 된장과 김치 한 가지라도

소반에 수저 가지런히 놓아

툇마루로 갖다 주었다

 

그땐 모든 게 궁핍했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마음 길에

도란도란 개울물 흐르듯

따뜻한 온기가 흘러갔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구자 시인

1939년, 경북 칠곡 약목 출생. 1994년 『대구문학』 신인상 시 당선. 1999년 『불교문예』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2005년, 시집 『낫골 가는 길』(그루) 출간. 2015년, 시집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출간. 2015년,「한민족作家賞」수상. 한민족작가회,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여류문학회, 칠곡문학회 회원. 반짇고리문학회 회장 역임. 대구시인학교 <사림시>, <솔뫼>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