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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우담 시인 / 카프카의 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3.

박우담 시인 / 카프카의 개

 

 

여인은 햇살을 쓰고

애완용 개는 파라솔을 쓰고

건널목은 스위치를 거머쥐고

붉고 푸른 길을 만들고

헐렁하게

개가 여인을 데리고 건너간다

 

개의 두개골에

저장된 소리는 꽃잎이었다가

이파리였다가

여인의 절정이었다가

다시 꼬리를 흔드는 의성어가 된다

여인이 개를 쓰다듬으며 건너간다

 

전생과 후생이 엇갈리는 미로 속으로

개와 여인이 흘러들어간다

광고판이 기다란 혀처럼 그림자를 내리깐다

파라솔에 반쯤 가려진 채 신호가 바뀐다

점멸하는 신호등 사이에 묻힌 시간의 도면 위로

개도 여인도 보이지 않는다

 

 


 

 

박우담 시인 / 네안데르탈 5

 

 

나는 총을 맞고

쪼개진 시간의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자작나무 숲이 보이고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에 길이 나 있다

걸었던 기억이 비릿한 안개 속에 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너덜너덜한

비릿한 시간의 근육들이

푸줏간의 고깃살처럼

검은 피를 흘리며 매달려 있다

흉곽 속엔 희디흰 자작나무들의 벗겨진 껍질

암매장 된 기록들, 꿈틀거리는

나의 장기들

소금 간 없인 읽을 수 없다

코를 씰룩거리며 초침이 지나간다

또 다른

나의 묘비 앞에 내가 있다

검은 비가 숲을 덮는다

 

 


 

 

박우담 시인 / 모래

 

 

달의 표면은 난시의 골짜기

둥근 원이 여러 겹으로 보이지

시간의 관절들을 동심원으로 쟁여놓고 있어

샅바만으로 연착륙하는 전사(戰士)들에게

우리는 운석이 되도록 찬사를 보내지

모래판을 제압한 그들의 비행

이따금 우리는 인생을 완결판으로 오해하지

살갗으로 전해오는 심장의 전언을 잘 해독해야 해

고무래로 뒤적거려 놓은 우주 공간

숱한 전사들이 지나쳤지만 그림자만 널려 있어

이 바닥에선 제한시간 안에 영혼을 팔아야 해

오, 다크서클

오로라가 가끔 찬란한 신으로

호명되기도 하지 우리는 난시니까

머릿속에서 시간이 샅바를 당기고 있어

전사의 후생인 우리는

모래 위의 마지막 발자국

 

—시집『시간의 노숙자』(2014)에서

 

 


 

박우담 시인

1957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04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계간 『시와 환상』 主幹 역임. 시집 『구름트렁크』『시간의 노숙자』. 《경남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경남시인협회》 회원. 2015. 제2회 형평문학상 지역문학상 수상. 현재 성균관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