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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림 시인 / 그냥 한번 불러보는
엄마, 한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사산된 울음아 소경을 불러 미친 어미를 꽁꽁 묶고 복숭아 나뭇가지로 후려치면 비명소리에 도망치던 귀신아 엄나무 가시를 뽑을 때마다 생각나는 그리운 역병들아 그 흔한 봉분도 관도 없이 처형의 세월 견디고 있는 말의 침묵, 말의 형벌아 너 가면 나도 갈 텐데, 남긴 뼈 하나 채 수습하지 못한 청춘아 버려진 상엿집 똬리 튼 배암 옆에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빠져 자는 오색 만장 같은 슬픔아 단 한 번의 사정(射精)을 위해 백 번을 참고 참았다가 오는 새벽아 허공에, 넋전이 나부끼고 무쇠식칼이 날아다니고 쌀알이 흩어진다 흰 피 풀어 씻김굿 하는 어둠 아 환한, 밤의 자궁아
강해림 시인 / 장마
복지교회 옥상 위에서 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첨탑 십자가를 향해 빗줄기가 심문하듯 창끝, 꽂힌다 시멘트 바닥 널브러진 검은 비닐봉지와 널빤지 조각들 퉁퉁 불은 기억의 한쪽 끝을 움켜쥔 채 빗물 토해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 꿈과 현실을 사선으로 이어주던 양철계단이 삐걱거리며 무거워진다 빗소리에 지붕과 지붕, 번지와 번지 사이 구원이라 믿었던 길들 경계가 실려가고 삶의 찌꺼기가 홈통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상을 온통 붉은 녹물로 뒤섞어놓으며 범람하는 시간의 하수도는 만원이다 밤새 중얼거리던 주기도문이 떠내려가고 누추와 생활의 무게로 달그락거리던 세간살이가 떠내려간다 며칠째, 옥상 안테나는 복음 대신 빗소리를 송전하고 있다
강해림 시인 / 불멸의 완성
3300년 전 무덤 속 완두콩이 부활했다 이집트 왕국의 열아홉 살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이 죽을 때 부장품으로 넣었던 것 투탕카멘은 황금 가면을 쓴 미라로 왕가의 골짜기에서 발굴되었는데,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는 파라오의 저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는데
지하 무덤은 입구를 봉하고, 주검으로 가는 계단마저 감추고 꼭꼭 숨겨두었던 것 그토록 많은 낮과 밤이 서로 몸 바꾸어 흘러가면서 길들였을, 야생의 유전자는 비밀이다 다만 물 한 방울 없는, 차가운 석관 같은 오래 무릎 꿇은 제의祭儀의 시간이 끔찍하다 만지면 먼지처럼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주검 냄새가 고 작은 몸의 갈증 속으로 스며, 스스로 사막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피루스 두루마기에 쓴 마법의 주문*이 관 속에서 흘러나와 감히 불멸을 꿈꾸었던 것
황금 가면을 벗는 미라의 얼굴은 눈도 코도 없다 움파 파인 흔적만 있다 쩍쩍 금이 간 몸에 홍조가 돌아, 싹이 트고 푸른 넝쿨을 뻗고 올라가 보랏빛 꽃을 피우고 허공에, 주렁주렁 깊고 푸른 방을 차렸다
오늘 밤 왕의 식탁에 올려도 되겠다
* 티베트 <死者의 書>를 일컬음
강해림 시인 / 소금
이것으로 눈물밥을 짓고 시를 쓰고 내 상처에 대고 박박 문지르기도 했는데, 이것이 없으면 사는 게 영 맹탕이었는데
슬슬 뿌려두기만 해도 펄펄 살아 큰 소리 치던 것들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처분을 기다리지 방금 막 꽃 피운 죽음의 DNA도 꼼짝 못하지 ‘소금을 어기지 마라’는 소금의 율법 앞에서
이것을 얻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고, 세계사가 바뀌고, *수백킬로미터 아라비아 모래해변을 맨발로 걸어간 이가 있었지 비폭력의, 이것의 투쟁하는 눈빛으로
쨍쨍 태양미사가 시작되고
염부는 사제가 되어 성소인 염전에 들지 검은 장화를 신고 바다를 밀고 다니느라 뜨겁게 타오르지 저 끝없는 노동, 스스로 번제燔祭에 오르기 위해 벌겋게 익어가는 중
이윽고 마지막 남은 등뼈까지 다 태우고 증발하자 펑펑 흰눈이, 하느님도 모르게 누가 뿌려놓으셨나 죽음이라는 상징에 핀 부활의 수사가 눈부시지
* 간디의 소금행진을 말함
강해림 시인 / 금서(禁書) - 타클라마칸
불모라는 어휘의 어원을 찾아 간다 낙타나 흰목숲쥐가 낙타풀이나 선인장 같은 가시 돋친 것들만 즐겨 먹듯
먹다 뱉은, 붉은 피로 물든 가시의 흔적도 풍사침습의 흔적도 없다 風紋, 바람의 문양만 있다.
읽는 순간 모래글씨가 사라진다
태양이 갈라놓은 명과 암 극명한 각이 흘러내리는 모래구릉은 관능이다 아찔한 죽음의 엉덩이,
시간의 기억마저 후끈거리며 녹아 흘러내리는 열기 속에서 책은 스스로 극한이 되어 무겁고 또한 가볍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동한다
모래무덤 속 미라처럼 바짝 마른 문장은 비틀어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겠다 동의반복의,
가시 돋친 혓바닥에 핀 꽃들은 향기가 없다지
목적지이기를 사양할 것 모래 속에 잠든 왕국 누란도 천막궁전도 내 위에 세우지 말라는 사막의 율법
저 검은 채찍 같은 고요에 홀려 길을 잃고 사막여우라도 만났으면 금방이라도 괴물이나 유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책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래폭풍을 불러 일으켜 순식간에 천지를 깜깜하게 만들어놓고 내 입을 틀어막자, 아무 일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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