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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정 시인 / 세상의 불빛 한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5.

김태정 시인 / 세상의 불빛 한점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맹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김태정 詩集(창비시선ㆍ237)『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김태정 시인 / 미황사(美黃寺)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색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트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김태정 시인 / 멸치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국냄비

생의 한때 격정이 지나

꽃잎처럼 여려지는 그 살과 뼈는

고즈넉한 비린내로 한세상이 가득하여,

 

두 손 모아 네 몸엣것을 받으리

뼈라고 할 것도 없는 그 뼈와

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살과

차마 내지르지 못하여 삼켜버린 비명까지도

 

 


 

 

김태정 시인 /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럼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김태정 시인 / 서정저수지-리미에게

 

 

그때 우린 저수지 둑 위에 앉아 있었지

어둠이 빚어낸 달빛에

삐비풀은 그림자로만 흔들리고

너무 깊이 물소리를 감춰 차라리

텅, 비어 있는 것만 같던 저수지

너의 노래는 낮게 더 낮게

잔잔한 비늘결에 물수제비를 띄우며

어둠 저편으로 가라앉았지

 

두륜산 어느 암자에 두고 온

네 첫사랑은 알코올중독이라 했겠다

무심코 바람이 불어

달빛 속을 튕겨오르는 은빛 물비늘떼

 

열다섯 무렵부터 앓게 된 간질은

스물아홉의 풋사랑마저 허락지 않는다며

너는 또 쓸쓸히 웃었던가

 

하여 너의 사랑은, 깊이 감춰

텅 빈 것만 같은 너의 사랑은

어둠이 가만가만

달빛을 그늘새김하는 꽃살문 저쪽

몰래 취기 어린 사내의

뒹구는 술병 속 공명으로만 사무칠 뿐

깊이 감춰 텅 빈 것은

너의 사랑만이 아니어서

 

그때 우리 다만, 저수지 둑 위에 앉아 있었던가

달빛이 너와 나 사이

비밀경전처럼 내밀한 경계를 이루고

 

어둠을 완성하는 너의 침묵과

달빛을 갈망하는 나의 결핍 사이

깊이 감춰 텅 빈 것은 저수지만이 아니어서

 

 


 

김태정 시인(1963~2011)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남.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우수」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등단 13년 만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냄. '시만 빼고 다 버렸다'며 전남 해남 근처 미황사라는 절 아래 동네로 내려가 혼자 살다가 2011년 9월 6일 암으로 세상을 떠남.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