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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재운 시인 / 접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6.

홍재운 시인 / 접시

 

 

접시가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돗물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사기조각들이 내 눈 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 놓쳐버린 접시들을 헤아리며 헤아리며 그래 깨져라 깨져라 유리잔아 주민등록아 끝내 아무것도 담지 못한 접시들아

 

수돗물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밤마다 햇살이 내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홍재운 시인 / 정자역 지나 오리역에도 비가 흐른다

 

 

비가 흐른다 명일동 바닥으로

비가 흐른다 아들아 아들아

비가 흐른다 엄마 엄마

비가 흐른다 바닥엔

끌어안을 수 없는

비가 흐른다

 

구름 베란다에서 흘러내리는 눈동자들을 바라본다 새벽이 흠뻑 젖은 채 어디론가 흘러가고 열린 하늘이 눈동자를 흘려보내고 손가락이 미끄러진다 유리창으로 내 얼굴이 흘러가고 커피가 흘러가고 비가 흐른다

 

어제도 흐르고 오늘도 흐른다

동대문 의류시장과 이데아 고시텔 위로

성남에도 의정부에도 비가 흐른다 어느새

4살의 아이는 열 살이 되고

사춘기의 딸아이는 성년이 되고

30대의 내가 40대가 되었다

 

내 품을 떠난 딸아이가 왔다 가고 끌어안을 수 없는 비가 흐른다 창문이 흘러내리며 눈방울이 흘러내리며 흘려도 마르지 않는 아들의 방이나 딸의 방에서는 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구름 심장에서 나뭇가지에서 정자역 지나 오리역에도 비가 흐른다

 

비는 흐르고

불꺼진 창문들은 귀를 막는다

비는 천둥과 바람을 끌고

동대문시장과 고시텔 위로

아들의 손목을 잡듯

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듯

도로가 흘러가고 명일동이 흘러간다

자동차가 흘러가고 또

비가 흐른다

 

 


 

 

홍재운 시인 / 소설이 오고

 

 

고무줄 위에서 오늘은 어떤 표정일까, 언어를 불러 봐요 나뭇잎과 문자가 겹친다면, 나뭇잎과 문자가 바뀐다면,빵과 빵 사이가 멀어진다 너와 나 사이에 끼워 넣은 문자가 멀어진다

 

꿈처럼 벌어진 손가락들이 긴 목을 하고 나는 사라 진 틈속에서 편지가 되고 망가진 오늘은 부풀어 빵이 될 텐데

 

사라진 문자가 팽팽해진다 나뭇잎이 사라진 문자 를 삼키고

 

마술을 보러가요, 거대한 식빵들이 걸어 나오는 무대를 보러가요 오늘이 사라진 문장에서 소설이 오고, 거짓말처럼 사라진 나뭇잎을 사랑해, 사라진 나뭇잎을 깨우며 꿈처럼, 소설처럼,

 

눈 내리는 골목은 다시 먼 길을 가고

 

 


 

 

홍재운 시인 / 사랑접시

 

 

당신의 자리는 텅 비었어요

접시 위에 시금치가 그득한데

식탁에 앉아 참기름과 뒤섞여 있는데

식탁의 한쪽이 찌그러져요 나는

시금치에 담겨 있는데

접시가 빈자리로 자꾸 기울어요 당신은

제 자리로 돌아가 처음 이전으로 사라지는데 나는

각진 식탁을 따라 돌고 돌아요 당신

자리에서 내 손이 얼음조각으로 변해요

얼음꽃이에요

당신이 돌아서고 내가 돌아서면

얼음조각이 내 안에서 산산이 부서져요

뜨거운 얼음꽃이에요 당신의

접시가 얼마나 얇고 가벼운지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지 얼음꽃이에요

얼음꽃이 피고 접시는 빈 등불을 담아요

그림자 없는 흔들림이 식탁을 더듬어요

접시의 끝이 어디냐고 내가 물으면 당신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요

볼을 타고 흘러요

입술을 타고 흘러요

얼어버린 접시를 따라 흘러요 목 아래로 흘러가요

녹지 말아요 내가 지워져요

 

 


 

 

홍재운 시인 / 그 여자의 방

 

 

밤마다 선인장이 자란다. 불을 끄면 모래알들이 침대위로 쏟아진다. 선인장은 여자를 여자는 아스피린에 쫒긴다. 모래가 쏟아진다. 모래가 흘러내리는 밤 불안이 움츠린다. 아스피린은 움츠린 발톱에서 피를 뱉어낸다. 잠은 없다 꿈도 없다 여자는 없는 꿈을 찾아 마주한 벽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흘러내리는 모세혈관을 따라 귀는 플러그를 꼽고 여자는 다시 한낮의 소리에 서 있다 지하철소리 발자국소리 자동차 경적소리들이 은유가 된다. 은유는 노동이 되고 알리바이가 된다. 그러나 잠도 없다 꿈도 없다 당연히 詩도 없는 중독 된 여자의 방에서 모래가 쏟아진다.

 

 


 

 

홍재운 시인 / 구두

 

 

구두 속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이렇게 앞뒤가 막힌 방도 없을 겁니다

구두 속의 다섯 식구는

독방에 갇혀있습니다

오래된 티눈이

사막의 선인장처럼 박혀있습니다

구두 속의 문을 나는

열 수 없습니다

열 수 없는 문 때문에 뛰쳐나갈 수 없지만

구두가 없다면 다섯 식구가 없다면

한 발자국도 나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불꺼진 거리를 걷고

비틀거리는 내가 걷고

끝날 것 같지 않는 이 거리에

구두가 있습니다

구두 속의 발은

아무도 안으로 들일 수 없는

끈으로 묶여있습니다

구두 속에서 나는 알 몸 입니다

 

 


 

홍재운 시인

강원도 춘천 출신. 2005년 계간 《시와 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정자역 지나 오리역에도 비가 흐른다』와 『붉은 뱀을 만나다』『오늘 비가』가 있음. 제12회 이상시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문학미디어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