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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현서 시인 / 능소화에 부치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6.

유현서 시인 / 능소화에 부치다

 

 

수직의 낭떠러지를 맨주먹 맨발로 오른다

 

당신에게 가는 길, 혹은 내게로 오는 외골목을 주황나팔

내어 불며 간다

독을 품고 온다

 

방향없이 가두는 독, 나는 뷸륜이라 명명했고

당신은 사랑이라 칭했다

 

소문은 누구에게나 치명타다

 

내게서 찾는 것일까

담 너머 금낭화 씨앗이 영글다 떨어지고

함께 거닐던 샛길이 폭풍우에 짓밟힌다

 

어쩌면 한 잎

어쩌면 한 줄기

어쩌면 한 뿌리

 

통꽃으로 이우는 당신, 황홀한 잠시잠깐의 흡반이다

늘 꼿꼿한 슬픔 하나가 나를 주저 앉힌다

 

 


 

 

유현서 시인 / 옆집 여자

 

 

엄마를 꼭 빼닮았다는 그녀에게서 감꽃냄새가 난다

 

봉숭아씨앗처럼 뜅겨져 나간 배다른 아이 둘을 낳은 엄마.

아버지가 당신 때문에 비명횡사했다는 오명을 쓰고 뛰쳐나간,

팔자 더러운 엄마 이야기를 눈물콧물로 닦아내는 여자

 

어린 그녀를 버린 대가로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라도 듣고 싶다는 여자

그러나 이젠 살아있다는 소식만이라도 듣고 싶다는 여자

단 한 시간이라도 엄마 품에서 펑펑 울어보고 싶다는 여자

 

늦은 밤까지 감꽃 떨어지는 마당으로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우는 여자

 

 


 

 

유현서 시인 / 당신을 다루는 법

 

 

난 꿈꿔요 당신의 몸속에서 유영하는 꿈을,

 

아무 때나 받아주지 않기에 속이 타요 하루에 딱 두 번, 출근할 때와 늦게 귀가하는 밤

 

스스럼없이 줘요

 

당신에게 들어갈 땐 절대로 급하게 굴면 안돼요 당신 몸이 열릴 수 있도록 아주 부드럽고 매끄럽게 살살 노크해야 해요 서두르면 반드시 탈이나요 너무 긴장해 나를 받아주질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아주 부드럽고 매끄러운 윤활제가 필요해요

 

또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네요 혼자가 아니에요. 저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길 원하나 봐요

 

왜 이리 뜨거워지죠 숨이 가빠오네요 철커덕, 당신이 열리네요

 

 


 

유현서 시인

1964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2010년 계간 《애지》로 등단. 시집 <당신을 다루는 법>. 2008년 제1회 여성조선 시문학상 및 전국재능시낭송대회 은상 수상. KBS 성우아카데미 심화과정을 이수, 현재「함께하는시인들 시문화연구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