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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정 시인 / 눈물의 배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6.

김태정 시인 / 눈물의 배후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

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

아침이슬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수염이 텁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네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

 

청소할 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

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

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도

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

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

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

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 사소한 콧물과 재채기 뒤에

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

 

꽃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 김태정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중에서

 

 


 

 

김태정 시인 / 오늘밤 기차는

 

 

오늘밤 기차는 나비처럼 나비처럼만 청산 가자 하네 청산엘 가자 하네 북덕유 남덕유 지나 육십령은 너무 늙어 청산은 간 곳 없고 반야 천왕봉 시방 일러 꽃내음 아득하니 섬진강 물후미 돌아 남으로 남으로나 내려가자네 오늘밤 기차는

 

나비처럼 나비처럼만 청산 가자 하네 청산엘 가자 하네 꽃아비야 너도 가자 쇠도 살도 산그늘에 흩어버린 채, 꽃각시야 너도 가자 감푸른 고기떼 달물결 타는 남해 큰 바다 여수는 여수(麗水)로되 잠도 꿈도 곤곤하련만

 

나비야 심청이처럼 심청이처럼만 풍더덩 뛰어든 심해 혼몽 끝에 꽃은 피어 온통 동백이로구나 그 환한 어혈 속에 집이 들어 비난수하는 할마이 잠마다 꿈마다 꽃이슬로 슬맺혀 있고야 나비야 청산 가자 여수 14연대 구빨치 뫼똥도 없는 아비의 기일이면 달싹쿵달싹쿵 꽃몸살 하는 동박새 함께 놀다 가자 밥도 잠도 폭폭하면 꽃그늘 속 푸르고 바랜 이끼 위에 살폿 머물다 가자

 

-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김태정 시인 /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목탁 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망연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 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장에 붙은 무당벌레의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서른여덟은 쓸쓸한 숫자

이미 상처를 알아버린 숫자

그러나 무당벌레들은 태앗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딛는 흰 고무신이 유난히도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갈피갈피 들춰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오줌을 누었습니다

눈앞에 해우소를 두고서 부끄럼성 없이

부처님께 삼배를 드릴 때처럼 다소곳이

무릎을 구부리고 마음을 내릴 때

흙은 선잠 깬 아이처럼 잠시 칭얼거릴 뿐,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김태정 시인 /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 행주치마 같은

두 칸 짜리 해우소

꼭 그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 쪽창같은

꼭 그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둣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 동백꽃

꼭 그만한 나무 한 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같은

 

 


 

김태정 시인(1963~2011)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남.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우수」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등단 13년 만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냄. '시만 빼고 다 버렸다'며 전남 해남 근처 미황사라는 절 아래 동네로 내려가 혼자 살다가 2011년 9월 6일 암으로 세상을 떠남.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