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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명 시인 / 써레질
질퍽한 논, 물 가두고 못자리 무논 써레질한다 경운기 지날 적마다 황토빛으로 비벼지는 논물 좌우로 비켜서면서 진주꾸러미 같은 물방울 만든다 흰 비닐 앞치마에 누런 장화 허벅지까지 끌어올린 농부 그 뒤를 치고 따른다 아직 살아있는 물방울들 긴 꼬리 내며 농부 뒤에서 동그랗게 사라진다 반듯한 수면 위에 반사되는 햇살 피하려는 듯 눈 지그시 감았으나 그 눈 모자챙 그늘에서 빛난다 물레방아처럼 도는 경운기 철바퀴에 곡예사같이 달라붙었다가 곤두박질 흙탕물 속으로 떨어지는 진흙 혓바닥 같은 장화밑바닥이 깊숙이 논바닥 핥고 올라오더니 한 발 앞에서 다시 박혀든다 사계절 한번 그들 세상이 온 듯 마구 설치며 새로 뽑아낸 베틀 북 같은 발자국 속으로 깔깔거리며 파고드는 흙탕물들 빙빙 그들 달래며 논바닥 돌아 나오는 농부이마에 벼알 같은 땀방울 흐르는데 앞산이 진달래꽃물 들이고 논바닥으로 슬몃 들어선다
이여명 시인 / 돌의 얼굴
돌 쌓아 있다 중간중간 납작한 돌 끼워 층층이 쌓아 있다 작은 돌이 큰 돌을 괴고 모난 돌이 둥근 돌을 괴고 짤막한 돌이 길쭉한 돌을 떠받치고 있다 큰 돌이 작은 돌을 모난 돌이 둥근 돌을 잡고 있다 길쭉한 돌이 짤막한 돌 안고 있다 검은 돌 옆에 흰 돌 잘난 돌 위에 못난 돌 머리 맞대고 있다 서로 볼 비비고 있다 올라앉고 혹은 서고 말 타기하고 있다
아랫돌 위해 윗돌은 서고 선 돌 위해 앉은 돌이 제 몸 깎아 들어오게 하고 있다 앞돌 위해 뒷돌이 물러나고 작은 돌 위해 큰 돌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서로 당겨주며 비좁게 박혀 있다 어깨동무하고 있다 하나라도 빠져 달아나면 석축은 무너질 것이다 한 공간을 꿰매고 있는 돌 자신을 위해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으면 한 벽 만들 수 없다 한곳에 오래도록 모여 사는 돌 바람과 햇볕을 품어 넉넉하고 유순해진 저 얼굴들
이여명 시인 / 지지대 빼는 법
늦가을 고추밭 놓을 때 지지대를 잡고 힘껏 빼 올리면 안 된다 원을 그리듯 왼쪽으로 몇 번 오른쪽으로 몇 번 흔들어 잡아당겨도 안 된다 한 해 한 번 들어온 지지대 구멍이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이쪽저쪽 자꾸 돌려서 구멍이 커졌다고 함부로 잡아당기지 마라 윗구멍만 커져 있다 삽으로 어느 정도 흙 파내고 지지대를 일렁일렁 빼 올려도 안 된다 허릿심만뺀다
박힌 지지대와 흙이 한 몸 되고 그 구멍 지지대를 꽉 물고 있다
다시 지지대를 박아라 무거운 도끼 등으로 다시 처박아라 그런 후 천천히 힘주어 빼 올리면 쑥 빠진다
이여명 시인 / 날개가 있어 슬픈
구경꾼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꽃무늬 커튼을 펼친 것 둥근 보석을 꿰어 늘어뜨린 것 같은 날개 덮어쓴 공작새
흰 뼈로 죽은 느릅나무 곁에 흙 묻은 꼬리 끌며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도롱이처럼 둘러친 날개 한 가닥 바람 새장 안을 돌아 나올 때도 날개의 몸 비틀거렸다
몸뚱어리는 왜 날개에 붙어 있나 날개는 왜 몸뚱어리를 붙잡고 있나 날개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
날아가기에 새장은 너무 깊은 공간일까 그에게 새新집을 내줄 수 없구나
화안火眼이 박힌 천사의 깃털 악마의 목소리, 도둑의 지혜를 가졌다는 새여 보석에 파묻힌 여인 같은
모이 훔쳐 쪼고 버드나무 위로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
이여명 시인 / 갓바위에서 절하기
메고 간 가방 풀어 향과 양초 공양미를 아내 손에 건넨다
향 서너 개 불붙이고 앞서 누군가 행한 것처럼 수많은 촛불 속 내 촛불 꽂는다
몇 걸음 물러 나와 무얼 잡을 듯 공중에 두 손 모으고 가슴에 가져온 후 팔 뻗고 절을 한다 두 손 뒤집어 조금 들어 올린다 소원이 손바닥 위에 고요히 올려지듯
아무도 모르게 얻을 수 없다는 듯 보여 준다 무슨 소원 얻은 것일까
아무것도 없다 다시 거두곤 일어나 또 절한다 손바닥 들어 올린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아내의 손 수많은 날, 수많은 손바닥 향불꼬리같이 흐르는 저 손끝을 위해 나는 여태 무엇 했나
아무것도 없는 빈 가방 아내 모습만 가득 담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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