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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여명 시인 / 써레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6.

이여명 시인 / 써레질

 

 

질퍽한 논, 물 가두고 못자리 무논 써레질한다

경운기 지날 적마다 황토빛으로 비벼지는 논물

좌우로 비켜서면서 진주꾸러미 같은

물방울 만든다 흰 비닐 앞치마에 누런 장화

허벅지까지 끌어올린 농부 그 뒤를 치고 따른다

아직 살아있는 물방울들 긴 꼬리 내며

농부 뒤에서 동그랗게 사라진다

반듯한 수면 위에 반사되는 햇살

피하려는 듯 눈 지그시 감았으나 그 눈

모자챙 그늘에서 빛난다 물레방아처럼 도는

경운기 철바퀴에 곡예사같이 달라붙었다가 곤두박질

흙탕물 속으로 떨어지는 진흙

혓바닥 같은 장화밑바닥이 깊숙이 논바닥 핥고 올라오더니

한 발 앞에서 다시 박혀든다

사계절 한번 그들 세상이 온 듯 마구 설치며

새로 뽑아낸 베틀 북 같은 발자국 속으로

깔깔거리며 파고드는 흙탕물들

빙빙 그들 달래며 논바닥 돌아 나오는 농부이마에

벼알 같은 땀방울 흐르는데 앞산이

진달래꽃물 들이고 논바닥으로 슬몃 들어선다

 

 


 

 

이여명 시인 / 돌의 얼굴

 

 

돌 쌓아 있다 중간중간 납작한 돌 끼워 층층이 쌓아 있다 작은 돌이 큰 돌을 괴고 모난 돌이 둥근 돌을 괴고 짤막한 돌이 길쭉한 돌을 떠받치고 있다 큰 돌이 작은 돌을 모난 돌이 둥근 돌을 잡고 있다 길쭉한 돌이 짤막한 돌 안고 있다 검은 돌 옆에 흰 돌 잘난 돌 위에 못난 돌 머리 맞대고 있다 서로 볼 비비고 있다 올라앉고 혹은 서고 말 타기하고 있다

 

아랫돌 위해 윗돌은 서고 선 돌 위해 앉은 돌이 제 몸 깎아 들어오게 하고 있다 앞돌 위해 뒷돌이 물러나고 작은 돌 위해 큰 돌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서로 당겨주며 비좁게 박혀 있다 어깨동무하고 있다 하나라도 빠져 달아나면 석축은 무너질 것이다 한 공간을 꿰매고 있는 돌 자신을 위해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으면 한 벽 만들 수 없다 한곳에 오래도록 모여 사는 돌 바람과 햇볕을 품어 넉넉하고 유순해진 저 얼굴들

 

 


 

 

이여명 시인 / 지지대 빼는 법

 

 

늦가을 고추밭 놓을 때

지지대를 잡고 힘껏 빼 올리면 안 된다

원을 그리듯 왼쪽으로 몇 번 오른쪽으로 몇 번

흔들어 잡아당겨도 안 된다

한 해 한 번 들어온 지지대

구멍이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이쪽저쪽 자꾸 돌려서 구멍이 커졌다고

함부로 잡아당기지 마라

윗구멍만 커져 있다

삽으로 어느 정도 흙 파내고

지지대를 일렁일렁 빼 올려도

안 된다 허릿심만뺀다

 

박힌 지지대와 흙이 한 몸 되고

그 구멍 지지대를 꽉 물고 있다

 

다시 지지대를 박아라

무거운 도끼 등으로 다시 처박아라

그런 후 천천히 힘주어 빼 올리면

쑥 빠진다

 

 


 

 

이여명 시인 / 날개가 있어 슬픈

 

 

구경꾼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꽃무늬 커튼을 펼친 것

둥근 보석을 꿰어 늘어뜨린 것 같은

날개 덮어쓴 공작새

 

흰 뼈로 죽은 느릅나무 곁에

흙 묻은 꼬리 끌며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도롱이처럼 둘러친 날개

한 가닥 바람 새장 안을 돌아 나올 때도

날개의 몸 비틀거렸다

 

몸뚱어리는 왜 날개에 붙어 있나

날개는 왜 몸뚱어리를 붙잡고 있나

날개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

 

날아가기에 새장은 너무 깊은 공간일까

그에게 새新집을 내줄 수 없구나

 

화안火眼이 박힌 천사의 깃털

악마의 목소리, 도둑의 지혜를 가졌다는 새여

보석에 파묻힌 여인 같은

 

모이 훔쳐 쪼고 버드나무 위로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

 

 


 

 

이여명 시인 / 갓바위에서 절하기

 

 

메고 간 가방 풀어

향과 양초 공양미를 아내 손에 건넨다

 

향 서너 개 불붙이고

앞서 누군가 행한 것처럼

수많은 촛불 속 내 촛불 꽂는다

 

몇 걸음 물러 나와

무얼 잡을 듯 공중에 두 손 모으고

가슴에 가져온 후 팔 뻗고 절을 한다

두 손 뒤집어 조금 들어 올린다

소원이 손바닥 위에 고요히 올려지듯

 

아무도 모르게 얻을 수 없다는 듯

보여 준다 무슨 소원 얻은 것일까

 

아무것도 없다

다시 거두곤 일어나 또 절한다

손바닥 들어 올린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아내의 손

수많은 날, 수많은 손바닥

향불꼬리같이 흐르는 저 손끝을 위해

나는 여태 무엇 했나

 

아무것도 없는 빈 가방

아내 모습만 가득 담아 내려온다

 

 


 

이여명 시인

1950년 경북 경주 출생. 본명: 이종백. 경주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며 등단. 시집으로 『말뚝』 『가시뿔』이 있음. 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회원, 경주문인협회회원. 시in 동인. 공무원문예대전 우수상, 제3회 경주문학상 수상. 2000년대 시인회의 회원. <목마시> 동인 회장. 경주 불국동사무소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