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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효환 시인 / 길을 잃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8.

곽효환 시인 / 길을 잃다

 

 

   3월에 큰 눈 내린 후

   황새 한 무리 길을 잃었다

   검고 흰 날개를 펴고

   철원평야를 건너 순담계곡을 배회하다

   날개를 접었다

   바이칼 호가 아득하다

 

   나도 어딘가에 길을 잃고 버려지고 싶다

   아득히 잊혀지고 싶다

 

 


 

 

곽효환 시인 / 흰 철쭉

 

 

   금요일 밤 늦게까지

   막걸리며 소주며 맥주까지 몸에 쏟아 비우고

   의정부행 마지막 전철에 몸을 부렸습니다

   도봉역과 도봉산역 중간에 섬처럼 서 있는

   우리 집, 한신 아파트 초입에

   흰 철쭉 눈부시게 피었습니다.

   한동안 한참동안

   그 고운 자태에

   넋을 잃고 사랑을 읽었습니다

 

   아내는 취한 내 몸의 거죽을 벗기며

   도봉산에 홀린 것이라고 두런댔지만

   분명 흰 철쭉 그 고운 사연에 홀렸습니다

   두 돌이 지난 딸아이가 날마다 새말을 배우듯이

   이제야 철 늦은 사랑을 배우나 봅니다

 

 


 

 

곽효환 시인 / 야간열차에서 만난 사람

 

 

   여수행 전라선 마지막 열차

   자정을 앞둔 밤 열차는 우울하다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을 지나 자리를 찾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긴 숨을 내뿜고 나면

   일정한 간격으로 덜그럭거리며 출렁이는

   리듬을 따라 차창 밖으로 불빛이 흘러간다

   강을 건너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야경들,

   틈새가 없다

   문득 창밖으로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낯선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 곧 물을 것만 같은데

   정작 말이 없다

   흘러간 불빛만큼이나 아득한 지난날들에서

   누군가를 찾는데

   없다

   나도 그도 아무도 없다

   문득 대전역에서 뜀박질하며 뜨거운 우동 국물이 먹고 싶다

   옛날처럼

 

 


 

 

곽효환 시인 / 삼척항에서 고래를 보았다

 

 

   유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부둣가 마을에 살았다

   노을이 지고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오르면

   아직 놀이를 마치지 못한 아이들은

   어둑어둑한 골목에서 남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쉬움을 달랬다

   항구의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는 고래라고 했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만 하다고 아니 더 크다고 했다

   자반고등어와 조린 갈치가 먹어본 생선의 전부였던

   내륙의 소도시에서 온 아이는

   이내 주눅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렸고

   집보다 훨씬 더 큰 고래는 좀처럼 어림되지 않았다.

 

   솜털이 덜 가신 열아홉,

   정리되지 않은 더벅머리에 뻐드렁니 사이로 담배를 꼽아

   좌중을 사로잡던 눈가에 웃음 많은 대학신문 선배는

   강원도 남쪽 바닷가에서 온 고래라고 했다

   수몰지 단양을 가로질러 중선암 계곡에서의 수습기자 수련회

   그는 눈석임물이 흐르는 계곡물에

   한 시간을 넘게 몸을 담갔다

   내내 술을 마셨고 항상 여자가 있었고 또 바뀌었다

   ㅡ 적어도 내가 보는 동안은 그랬고 늘 경이로웠다

   신문을 만들 때면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바다였고

   크기를 알 수 없는 고래와 같았다.

   첨예한 떨림들, 기표를 넘나드는 활자들, 거친 숨결들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다시 바닷가에 섰다

   숙소 창문 너머 펼쳐진 비에 젖은 드센 겨울바다

   긴 여행길에 밀려드는 피로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말들이

   외롭게 천장을 맴돌다 흩어진다

   텔레비전 위성방송에서는 8피트가 넘는

   거구의 레슬러 빅쇼의 ‘빅쇼’가 지루하게 흘러가고

   멀리 칠흑의 바다 위에 뜬 집어등 몇 개

   젖은 창가에 표정 없이 떠 있는

   홀로 뒤척이는 겨울밤

   문득 집채만 한 아니 그보다 큰 고래가 번쩍하고 지나간다

   예전처럼 다시 무뎌진 내게로

   어둠을 넘어 여명처럼 그가 온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가 돌아온다

   검은 바다를 건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섬광 같은 것이 불끈

   삼척항의 밤을 붉게 물들이며 지나간다

 

 


 

 

곽효환 시인 / 그를 찾아가는 길

 

 

   진천군 이월리 17번 국도 따라 그를 찾아가는 길

   불쑥 얼굴을 내민 목련 두 그루

   철 늦게 핀 목련꽃 산산이 잎을 떨구는데

   대학시절 백미(白眉)처럼 뛰어난 문장을 쓰는 이가 되려고

   청주 옆 문백(文白)에서 왔다는

   신산스러운 세월을 강철같이 살아내던 그가

   아프다네요 많이 아프다네요

   아주 많이 아파 귀향했대요

 

   더 늦기 전에 얼굴 한번 보러 오라는

   그늘 가득한 목소리따라

   빛바랜 폐휴지 조각처럼

   목련 꽃 뚝뚝 떨구는 날에

   그를 찾아가는 길

 

   숨결 같은 봄바람 불 때마다

   누렇게 바랜 목련 꽃잎 날리네요

   바람이 불면 꽃잎 떨어지고

   다시 바람이 불면

   하얀 목련꽃 엉엉 울며 다 지겠지요

   괜스레 눈가에 물기가 촉촉이 어리는

   이 신파 같은 봄날에

   철 늦게 찾아와 스칠 듯 지나가는 계절에

   차일피일 미루다 더는 미룰 수 없어

   그에게 가는데

   하필 철 늦게 꽃잎 떨구는

   목련 두 그루 좀체 지워지지 않네요

 

   지금은 물에 잠겼을 구단양 수몰다방에서

   수몰지를 다 막아설 만큼이나 어깨가 넓었던

   중선암 도락산장 계곡에서

   술로, 모닥불 가의 정담(政談)으로 밤을 지새우던

   장발의 그와 함께했던 날들이

   이젠 다시 영영 오지 않겠지만

   이렇게 가까스로 의무방어전 치르듯이

   다시 그를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동시대에 같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곽효환 시인 / 언제 다시 보자는 말

 

 

   둔촌시장 어귀에서

   오래전 친구를 기다린다

      결혼은 했겠지 그 때 그 여자일까

      아이는, 부모님은, 직장은……

   세꼬시 횟집에서 마주 앉은

   그의 모습에서 이십 년을 건너 뛴 내 나이를 읽는다

   성근 머리칼, 볼록 나온 아랫배, 왜소해 보이는 팔과 다리

   아내는 전에 그녀가 아니라고 했고

   아이는 둘이고 모두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했고

   내내 공부만 하다 지금은 아버지 사업을 돕는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안부를 묻고 술잔을 주고받고

   이야깃거리가 마를 무렵 자리를 옮겼다

   다시 한참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잡담

   그리고 언제 다시 보자고

   기일 없는 약속을 남기고 발길을 돌린다

   높낮이가 평평하기만 하던 일자산(一字山)이

   집으로 가려면 이리로 오라고 부른다

 

   문득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렵다

   그리고 헤어질 때 건네는

   언 · 제 · 다 · 시 · 보 · 자 ·

   는 말이 나를 더없이 속물이게 한다

   둔촌시장 길따라

   사람들 사이로 숨고 싶다

 

 


 

곽효환(郭孝桓) 시인

1967년 전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와, 2002년 『시평』에 〈수락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인디오 여인』,『지도에 없는 집』,『슬픔의 뼈대』 등과  그밖의 저서로는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등과  편저 『이용악 시선』, 『구보 박태원이 시와 시론』, 『아버지, 그리운 당신』,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이용악 전집』(공편) 등이 있음. 고대문학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현재 대산문화재단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