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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성원 시인 / 몇 분간의 몽상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5.

정성원 시인 / 몇 분간의 몽상

 

 

지하철은 파란 선에서 움직였어 대기 중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대 처음

타는 사람들 잘 들어 신발은 벗는 거야 역무원한테 참잘했어요 손등 도장

찍혀야만 환승 가능해

 

나는 큰소리로 웃다가 멈칫했다 사람들이 웃질 않아 충혈된 눈동자를

가진 사람 동공이 비어있는 사람

 

빈 동공으로 노을이 색을 버리고 있다

 

낡은 지하철이 깔깔대며 철로를 통과한다 사람들 척추는 왜 파랄까

 

팔에 지느러미가 돋는다 이번 역은 까마귀가 있는 밀밭 역입니다 내리

실 문은 우울한 먹구름 쪽입니다

 

툭,

갇힌 여자 입술이 스피커로 튀어나왔다 이 여자야 흐름 끊지 말고 들어가

 

나가자

뜬구름 α는 나가지 말자 했다

뜬구름 β는 하늘이 어둡다 했다

나는 진한 하늘을 두 손으로 쫙 벗겼다

 

저것 좀 보세요 하늘이 말랑한 피부를 가졌어요 지느러미 젖히고 별들

을 피해가세요 당신과 비슷한 유성을 만나면 삼켜도 좋아요

 

지구를 벗어나자 먹구름이 한곳으로 몰려간다

예언은 언제나 빗나가고

 

이쯤에서 비가 내리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멀리 더 멀리 위로 아래로

어지러운 세계에서 벗어날 텐데

 

낯선 행성에서 뜻밖의 과실이 쏟아진다 별자리가 제 맘대로 자리를 바

꾸는 동안

 

우리는 끝없는 바다에 갇힌다 뜬구름에 물갈퀴가 생긴다면 바다 어느

곳에 내 비밀을 새겨야겠다 미친 뜬구름과 더 미친 먹구름의 예언서를 찢

어야겠다 뜻밖의 과실을 종언으로 삼아야겠다

 

생각이 미치는 찰나,

 

다음 역은 건축무한육면각체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주사위 굴러가는 쪽

입니다

 

- <시와문화> 2020년 겨울

 

 


 

 

정성원 시인 / 안개제조공장 굴뚝에 사는 소녀를 아니?

 

 

일정한 무게를 가진 안개

폐가 부풀어 하늘로 붕붕 뜬다면 누구 배 좀 눌러주실 분?

 

허공에서 소녀가 뿜는 안개는 단조로운 모양이야

 

이를테면

 

안개공장장이 소녀로 가득 찬 옷장을 가졌다든지 한 명씩 꺼내 속을 갈라본다든지 겉은 늙고 속은 생생한 아이러니를 마주한다든지

 

옷장의 소녀가 갈라지는 건 단추야

그럼에도 심장이라 우겨볼까

 

상관없고,

 

소녀는 달마다 죽은 태양을 낳는다

 

죽은 태양에 뿌리내린 안개나무, 온기를 흡수하지 못한 꽃송이, <찾습니다> 전단지가 소리 지르며 피어나는 계절에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수많은 실종이 만개하는 모습은 어떨 것 같아?

 

멈추지 않는 는개,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멈추지 않는 노래,

 

상실은 자주 노래를 부르게 한다

노래를 뿜어내는 굴뚝에서

 

포식자가 된 안개를 모른 척해줘

 

 


 

 

정성원 시인 / 도무지 잠들지 않는 밤엔 해바라기를 생각해요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양털베개를 벤다 양은 찢어진 입과 긴 손가락을 가졌다 숨을 마시려 배를 달싹일 때마다 밀쳐둔 잠이 일렁인다

 

해바라기 뿌리에 숨겨둔 태양은 집으로 갔을까

어리석은 글자를 쓴 날엔 더욱 허기지는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입속으로 쏟아진다 단단한 글자가 심장을 찌른다

손가락을 펼치니 한낮이 보이고 한밤이 보이고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나를 빼곡히 알아가는 밤

불면은 불멸이 될 것이고 내 몸엔 양털이 돋을 것이고

 

해바라기가 허공으로 길을 내는 곳에서

 

눈을 감는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꽃이 핀다 꽃잎이 흩날리는 벽지에 잠이 뒤척인다

 

점점 두꺼워지는 어둠

기분을 굽힌 잠이 어둠을 삼키다

 

일흔아홉 여든 마리, 이리저리 몸을 들썩이다가

 

빙글빙글 도는 해바라기 벽지를 본다 다시 눈을 감는다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정성원 시인 / 깊은 개념은 얕은 문학시간에 다 배운 것 같아요

 

 

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시를 배운다

시의 해석을 받아 적는 것은 신물 나는 일,

 

나에게 주어진 하늘은 네모난 창

위로의 말이 창밖에서 서성인다

 

이팝나무와 나비를 구분 못 하는 눈이 나에게 필요할까요 눈을 바람에게 주고 깊은 잠에 빠질까요

 

수척한 바람이 손짓을 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구름 쪽으로 가닿는다

 

구름 너머 보이는 아버지

바다에서 출렁여야 할 당신이 햇볕물살을 그물에 담고 있다

 

빌어먹을 아버지,

나는 지금 푸른 비늘이 필요하다고요

 

이쯤에서

아버지에게 날개를 입혀주면 흥미로울까

 

잘. 생각 말고 잘- 생각하라던 문학 수업은 순전히 말장난

형식적인 문학 선생은 건조한 기호

아버지와 나는 아빠와 구름이라는 단조로운 공감각

언어를 탐색하는 우리는 일그러진 교실의 자화상

 

끝나는 종이 울린다

날개 입은 아버지가 손을 뻗는다

 

구름이 곡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성원 시인 / 손가락선인장

 

 

장마가 시작되면 마르는 것을 생각해

비의 그림자가 버석거린다 냄새는 말캉하고

 

죽으면서 경쾌한 비

 

젖는 곳이 있다면 한쪽에선 증발하는 마음

 

공평한 방식으로 비가 내린다

 

비의 얼룩이 지워지면 백단이 핀다

오아시스로 가자, 서로의 손가락을 깨물며 광활한 모래 언덕으로 가자

 

갈망은 처음부터 목이 마르는 목적을 가졌지

그것은 행선지를 방황하는 모래알갱이처럼 우리의 방황이 깊어진다는 말

 

등을 구부릴 때마다 굴곡진 생의 촉수를 달고

한 번도 내 편인 적 없는 너를 생각할래

 

백단 숲에 손가락이 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흔들린다

비의 내용을 기록하는 손가락이 버석거린다

 

 


 

 

정성원 시인 / 혼자 울어야 해서 시시한 상상만 해요

 

 

비밀을 도모했대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을 갖기로 했다는 말이래

비둘기 깃을 빌려 입고 하늘에 가까워질 때 시력을 나눠주기로 한 거래

 

꽤 기분 좋은 날이었대

 

손바닥을 펼치면 별의 잔해가 빼곡했대

그런 날은 많은 문을 그렸대

반짝이는 것을 보면 다 열 것 같았던 문은 종일 닫혀 있었대

 

뒤를 보아야 하는 순간을 모른 척한 거래

그렇다고 앞을 보는 것이 쉬웠다는 말은 아니래

 

쉽게 죽어야 하는 것들과 어렵게 살아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대

하늘이 내일이라는 말 같아서 내일에 동조하지 않기로 했대

 

비둘기는 어쩌다가 인간의 눈을 탐내게 되었을까

 

비둘기 깃을 빌리는 날이 늘어갈수록 눈이 흐려졌대

비둘기는 자기가 사람 족속이 다 된 줄 알았대

 

뜸뜸하게 운 것 같기도 했다는데

 

별 냄새가 진동하는 밤에는 눈이 먼저 아파왔대

 

비둘기가 눈알을 쪼아 먹는 상상을 했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팔을 활짝 펼쳤대

 

비둘기 깃을 입었대

날아야 하는 순간에도 발은 그대로 땅이더래

 

우리는 비밀에 침묵해야 했대

침묵할수록 또렷해지는 순간이 스펙트럼으로 터지더래

 

 


 

정성원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20년《시산맥》으로 등단. 제15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글도리깨 동인.